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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본 웹소설IP 영상화

하위문화, 팬덤, 그리고 IP 서사의 다양성

by 이성민

영화로 제작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보며, 콘텐츠IP와 팬덤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쟁점들을 많이 던져주는 사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와 웹툰을 함께 보며 든 생각들을 '후기'의 형태로 작성해보았습니다. 전독시의 오랜 팬이 보시기엔 또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을텐데요. 영화로 처음 전독시를 접하고 이후 웹소설과 웹툰을 읽는 IP연구의 입장에서 쓴 글이란 점을 고려해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의 후반부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 관람 후 웹툰 정주행 중. 영화는 재미있게 보았다. 오락 영화로서 충분히 재미있고, 영화의 서사에 맞게 끌고 가는 주제의식도 적당하다. 다만 원작 작가가 이야기 한 것처럼 기존 웹소설과 웹툰이 가지고 있던 화두로 2시간 남짓한 영화의 서사를 이끌고 가긴 어렵기 때문에 서사의 줄기가 되는 문제 의식이 바뀌었고, 그러다 보니 애초에 '독자'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원작의 결들이 변형되는 결과가 나왔다. 원작의 팬덤 입장에서 반발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을 둘러싼 유튜브의 담론 구조는 조금 흥미롭다. 원작 팬들에게 소구하는 발화자들은 이 작품이 얼마나 원작을 훼손했는지를 비판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위문화자본을 과시하는 상징투쟁과 같아 보인다. 사실 오징어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 비슷한 흐름을 본 적이 있다. 이때는 서바이벌 장르물의 팬덤이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이런 담론의 흐름이 깨지는 건, 기존 작품의 팬덤을 넘어서는 새로운 팬덤이 구축될 때 가능하다. 지금 나온 작품 스스로 독자적으로 하나의 원작으로서 팬덤을 모을 수 있다면, 새로운 논의의 지형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부턴 전독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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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작의 변형 수준으로 보면, '신과 함께'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전독시의 원작 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핵심에는 '이순신-충무공'의 화신 이지혜가 칼이 아닌 총을 든 것, 독자가 작가에게 사실상 '악플'을 단 것 등이 있다.

웹툰을 읽으면서 후자에 대해서는 냉정히 말하면 원작의 훼손이라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도 독자는 주인공 유중혁과 다른 태도, 정확히 영화에서 보여준 '혼자 살아남을 것인가' vs '함께 살아남을 것인가'의 갈등의 지점을 드러낸다. 영화는 이 갈등의 축을 극대화하며 서사를 구성했다.

그러다보니, '성좌들'의 핵심 설정인 '이야기의 주인'이란 측면은 약화되었고, 충무로역-충무공의 연결 고리가 사라지며 (영화에선 지수가 연기한) 이지혜가 '총'을 들게 되는 변형이 나타났다. (이 부분에 대해 크게 분노하는 팬들이 많다. 사실 작가-이야기-독자의 관계를 풀어내는 원작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핵심을 배제한 선택이라, 사실상 '다른' 작품으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분노할만하다.) 이 부분은 영화 전독시가 독자적인 유니버스를 구성할 수 있을지에 따라 정말 패착일지 아닐지가 드러날 것이다. (칼의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니..) 분명한 건, 본래 작품의 핵심 주제로 되돌아오기기엔 이미 어려움이 생긴 선택을 한 것이라, 다른 영화만의 서사의 줄기를 잡아가야 하는 재구성의 과정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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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와 팬덤의 관계로 보면,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하위문화에 속하는 영역이 보다 확장된 대중을 만나게 될때, 이 접점에 서 있는 창작자는 고민하게 된다. 웹툰의 경우, 이 문제를 2000년대 초반에 많이 겪고 나서 지금은 웹툰 독자와 영화-드라마 관객 간의 간극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웹소설은 아직 그 단계로 진입을 하지 못한 시기에, 영상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소위 '멀티버스' 적인 이야기의 다양성을 품기엔, 아직 코어 팬덤의 경험, 혹은 여유가 부족하다. 정말 해당 작품의 성장과 확장을 기대한다면,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의 공존의 가능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기회가 각자의 '덕력'을 과시하는 상징투쟁의 계기로 그치게 된다.

그렇기에, 이번 '전독시'의 흥행 여부는 앞으로의 웹소설IP 영상화의 흐름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영화 시장이 단지 작품의 힘 만으로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영화소비쿠폰이란 변수가 나타났다. 이제 남은 건, 정말로 이 영화 자체의 작품의 힘에 달린 것일 수 있겠다. 여러모로, 결과와 그 이후의 흐름을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보론)

이 글을 작성한 이후, 본 영화가 '전독시' 원작의 핵심 원천 경험을 배반한 지점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고, 단순히 '상징투쟁'으로만 해석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아래에 조금 보완적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많은 원작의 팬들이 지적하듯이, 현재의 '전독시' 영화가 원천 경험의 장점들이 배제된 형태의 영상화였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경험'이 이런 방식으로 영상화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결국 영화의 문법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의 역할이 아직은 더 중요한 국면인데, 이분들이 웹소설을 바라보는 시각의 한계(혹은 차이, 시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은 이 문제를 다루는 담론 구조가, 이러한 갈등을 더 부각하며 주목을 얻은 방식란 점에 더 주목했고, 그래서 제가 '상징 투쟁'이란 표현을 쓰게 된 것입니다. 다만, 과거 웹툰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실험과 충돌이 반복되며 점차 해소되어 가는 흐름이었던 것 같습니다(웹소설을 경험한 세대의 영향력 확대, 웹소설 대중화 저변에 따른 타 분야 창작자의 웹소설의 특성 이해도 증가). 앞으로 전독시와 이후의 웹소설 영상화가 어떤 경로를 밟게 될지 더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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