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방송(2024.5)
*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 <신문과방송> 2024년 5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아카이빙 차원에서 브런치에도 업로드합니다. 게재된 글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kpf.or.kr/synap/skin/doc.html?fn=1682675184918.pdf&rs=/synap/result/research/
큰 도약 이후, 드러난 위험 신호들
한국 대중문화는 코로나19 판데믹의 확산을 거치며 큰 도약을 보여주었다. 한류의 성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치로 꼽히는 전 세계 한류 팬(동호인) 수는 2022년 12월을 기준으로 1억 7,800만명을 기록했는데, 이는 2012년의 926만명 대비 약 19배가 증가한 수치이다. 콘텐츠 수출액은 2021년 14조 3천억 원(124억 5천만 달러)를 기록해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년도(2020년, 128조 3천억원)와 비교할 때 7.1%의 높은 성장세를 보여준 것이다. 2022년 9월,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한 순간은 이러한 성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소위 ‘K-컬쳐’의 성장은 한국이라는 국가 이미지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 해외문화홍보원의 2022년도 국가이미지조사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한 자유 연상 이미지로 가장 먼저 문화(18.1%)와 대중음악(17.1%)을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같은 조사에서 한국 국가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현대/대중문화(65.6%)가 1위로 나타났다. 해외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성취에 특히 주목하고,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들을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이러한 ‘K-컬쳐’의 성취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 한국 대중문화 내부의 위험 신호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2023년 1분기 한국 영화의 매출 점유율은 29.2%로 나타났다. 2019년 1분기 64.0%와 비교할 때 충격적인 역전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 기간에 제작되어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도 90여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OTT 시장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넷플릭스 이외의 국내 OTT 들은 모두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오리지널 콘텐츠 경쟁으로 수급 비용은 높아졌지만, 수익의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출판 시장의 불황에 대한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얼마 전 교보문고가 창사 43년 만에 첫 희망퇴직을 시행하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국내 독서 인구 감소와 더불어 종이책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K-컬쳐의 기반을 이뤘던, 콘텐츠 분야의 소위 ‘뿌리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영역들의 약한 고리가 드러난 것이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겠으나, 워낙 큰 도약을 경험한 직후란 점에서 이런 위험의 신호 들은 더욱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위기는 늘 기존의 약한 고리로 부터 출발한다. 콘텐츠 산업은 장르와 분야로 나뉘어 있는 듯 하지만, 결국 대중문화로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거둔 성취들도, 한국의 문화적 역량의 전반적인 성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작은 균열이 누적되면 단단한 건축물이라도 견디기 어렵다. K-컬쳐의 도약이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러한 위험의 신호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선택과 집중’ 전략의 한계와 ‘균형’에 대한 고민
산업의 단기적 성장이란 관점에선 ‘선택과 집중’은 유용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강점을 중심으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의 선순환을 이어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과 집중 전략은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시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획일화된 시장의 구조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자주 극장에 방문하는 관객을 가진 한국 영화 산업이, 극장의 위기를 만나 가장 큰 혼란을 겪는 것이 대표적이다. 문화 시장의 변화의 속도가 빠른 현실에서 문화적 다양성의 저변 없이는 한순간에 적응 어려운 변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K-컬쳐의 성취가 특정 콘텐츠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과 지원 들도 주로 이러한 성취의 영역에 집중된다는 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고민스러운 부분은, K-컬쳐의 성장이 그 자체로 한국의 문화 생태계에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국내 인력의 해외 진출 가능성이 늘어난다. 이러한 진출 범위의 확장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취약한 국내 문화 생태계의 한계와 결합되는 순간이다. 한국에서 인재를 소화할 시장의 규모와 수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게 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재를 외부에 공급하는 역할에 한정되게 된다. 그리고 자생적인 생태계가 취약한 곳에서는, 좋은 인재를 길러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균형’이란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단순한 윤리적인 이유에서라고 볼 수 없다. 더 중요한 건 실질적으로 이러한 '균형'이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균형은 결국 ‘다양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넷플릭스를 통해 거둔 영상 콘텐츠 분야의 성과도, 국내 시장의 한계를 넘어서 글로벌 시장을 향하게 되면서 보다 다양한 시도가 허락되면서 가능했던 것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성과가 이어지기 위해선, 우리 내부의 다양성 기반, 즉 다양한 문화 분야에서, 다양한 인재들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내부의 가능성으로 시선을 돌리고,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기
K-컬쳐라는 단어는 이미 ‘대외적인’ 성과의 지향을 품고 있다. 해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의 관점으로 한국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강점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 역량과 성과, 매력을 타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해서 내부적 시선의 편향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의 눈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요소들이 가진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건 분명 중요한 기회다.
그럼에도, K-컬쳐는 해외에서의 성과 자체에만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할 수 있다는 한계 역시 갖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시선을 내부로 돌리고, 우리 안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려는 노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컬 크리에이터의 활동 들이다. ‘살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지역의 혁신 창업가를 뜻하는 로컬크리에이터들은 지역의 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취향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통적인 예술과 콘텐츠, 문화의 틀에 딱 들어맞는 이들은 아니지만, 이들이 열어가는 새로운 생활문화의 흐름은 한국이 가진 문화적 역량을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이러한 문화적 시도를 하려는 이들은 곧 현장의 척박함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의 격을 높이는 시도를 하는 이들이, 다양한 한계와 벽에 부딪쳐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는 사례가 많다. 여전히 낮은 급여 수준과 열악한 노동환경, 좁은 시장의 한계 등을 경험함에도, 이에 대한 개선은 쉽지 않다. 돈은 소수의 정책적 관심이 있는 곳으로 몰리고, 영역의 경계에 있거나, 소외된 장르로 분류되는 분야는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K-컬쳐의 힘은 단지 기술적 매끈함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우리의 일상 문화의 매력에서 나온다.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가 매력적이지 않다면, K-컬쳐의 매력도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폭넓은 문화 향유 전반의 질적 수준에 대한 검토와, 이를 위해 애쓰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가들의 기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이러한 활동의 지속가능성이다. 이제 한국은 넘쳐나는 인구의 치열한 경쟁의 힘에 의존하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젊은 세대가 아무리 다양한 문화 경험과 이를 통한 역량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척박한 활동 기반을 언제까지 견뎌줄지는 미지수다.
이런 점에서 K-컬쳐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선, 내부와 외부 시선의 균형, 정책적 지원의 대상 측면에서의 장르 및 분야의 균형,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다양한 활동의 기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의 문화 경험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소수의 전략적 지원 뿐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문화 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고민들이 이어가야 할 것이다.
K-컬쳐의 단단한 성장을 기대하며
K-컬쳐란 단어에는 여러 욕망들이 중첩되어 있다.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문화가 국가라는 단위의 선전을 위해 도구적으로 동원될 가능성일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당장에 쓸모 있는 선도적 콘텐츠 일부에 주목이 집중되는 경향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성취의 이면에 담겨 있는 다양한 문화 영역의 유기적 관계와 숨겨진 기여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러한 유기적 생태계에 나타난 균열과 위험의 신호들에 주목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 K-컬쳐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기 위해선, 이러한 도구적 시선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K-컬쳐라는 단어와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된 표현은 백범 김수 선생님의 ‘높은 문화의 힘’일 것이다. 이때의 ‘높은 문화의 힘’이란 단지 다른 이를 압도하는 성취를 뜻하지 않는다. 문화란 사람들의 일상에 속하는 것이고, K-컬쳐의 성장이란 결국 한국의 문화가 세계인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자원으로 자리잡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 스스로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문화적 그릇을 더 크게 마련하려는 노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K-컬쳐의 성취가 신기루가 되지 않으려면, 보다 단단한 성장이 필요하다. 뿌리부터 단단하고 넓게 자리잡은 나무가 더 크고 높게 성장하고, 무엇보다 더 많은 이를 품는 나무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시선을 다시 내부로 돌리고, 취약한 영역들의 문제들에 주목하며, 그 안에서 실제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경험과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