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직장의 화법이 낯설다
직장에선 사랑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사랑은 퇴근 후, 가정을 위해 남겨놓으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랑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입바른 소리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조원들은 나이와 학번은 다르더라도 어쨌든 나와 같은 학생 신분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사적으로 친해지거나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친해지지 못한다면 한 번 보고 말 사이였다.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상하관계가 있었고 길게는 몇 년까지 얼굴을 계속 봐야 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항상 말을 조심하게 되거나, 선배들이 해준 조언들에 조금 상처받기도 했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다. 정말 신입사원 때, 그러니까 부서배치 후 한두 달 되었을 때 처음으로 혼자 회의에 들어갔다. UX와 개발팀이 함께하는 회의였다. 선배들이 몇 번 데리고 갔던 회의였지만 그 날따라 공교롭게도 선배들이 모두 회의 시간이 겹쳤다. 나는 관련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회의록만 써오자 하는 마음으로 회의에 들어갔다.
한참 토론을 하다가 UX에서 "(내가 속한) 전략부서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개발 히스토리를 모두 알아야 나의 의견이 생길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당황한 내가 "네? 아... 부서 의견 한 번 다시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 "아니, 한톨님은 회의에 참석하시면 회의 내용은 사전에 알고 와야할 것 아니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벙쪘다. 나는 메일 루프에도 없었다. 내 이름을 아실 정도면 내가 신입이라는 것도 알았을 터였다. 모두가 나를 쳐다봤고 회의실엔 정적이 흘렀다. 결국 내가 꾸벅 "죄송합니다."라고 한 뒤에야 다시 회의가 진행되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조금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회의록만 받아적었다.
나는 아직도 직장에서의 화법이 낯설다. 모든 것이 직설적이다. 누군가 나에게 직설적으로(나 어쩌면 다소 불쾌하게도) 말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아야 하고, 나도 말할 건 말해야 한다. 나에겐 이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학창 시절 때부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말에 쉽게 상처받는 만큼 말의 잠재적인 폭력성을 아는 나는 최대한 말을 돌려말했고, 말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지르는 실수에는 사과하려고 했다. 문유석 판사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그는 데이의 「세 황금문」을 언급하며,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문만 거치고 말을 하기 때문에 상처가 발생한다고 한다. 통통한 친구에게 “너 살 좀 빼. 건강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단지 사실이기 때문에 그 말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닌데 많은 사람들은 종종 무례함을 솔직함과 혼동하곤 한다.
예를 들어, 그런 적도 있었다. 오후 외근을 가야 하는 날, 갑자기 일이 떨어지는 바람에 허둥허둥하고 있을 때 선배가 “한톨씨는 시간 관리를 좀 더 잘 할 줄 알아야 해. 이제 신입도 아니잖아.”라고 말했다. 고마운 조언이었지만, 두 번째 문장은 굳이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갑자기 일이 떨어지는 건 나의 시간 관리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섭섭했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회사에서 비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조금씩 무뎌지는 것을 배우고 있다.
회사의 화법에 익숙해지는 방법에는, 너무 저자세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또다른 선배랑 일할 때의 일이다. 자료 취합을 하던 중, 단체채팅방에서 유관부서에서 보낸 자료 하나를 누락했다고 알려주었다. 습관처럼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였습니다.”라고 보냈는데, 옆에서 보던 선배가 말했다.
“그걸 왜 다 미안하다고 해, 한톨씨. 열심히 일하다 어쩌다가 한 번 작은 실수한 건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런 건 미안하다고 안 해도 돼. 그냥 ‘확인하여 수정하였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지.”
그러게,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나의 친언니는 예전에, 고마운 일에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친 게 아니라, 남들이 기꺼이 베푼 호의라면 미안한 대신 고맙다는 인사가 훨씬 반갑다는 것이다. 또 자꾸 미안하다고 하니 자존감이 낮아보인다고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회의에서도 그렇다. 아직도 가끔 그 때의 억울함을 생각한다. 내가 물론 무지했지만 그저 "제가 신입이라서 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됐는데 말이다. 물론 무지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지만 나는 신입사원이었고, 개발 용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용인될 만했다. 내가 할 말을 정확하게, 감정 없이 표현하는 것도 필요한 태도 중 하나였다.
나는 인간 관계의 풍요로움이 삶의 질에 큰 요소인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면 타격이 크다. 그래서 애초에 회사 사람들에게 다정한 어투나 따스함을 기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운이 좋아서 그럴 수 있다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라는 스탠스를 가지면서 조금씩 무뎌지는 동시에 나도 내 할말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 지킬 건 지켜보자. 부디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굳이굳이 ‘어’라고 하지 말자. ‘아’라고 표현해도 충분히 전달된다면 제발 ‘아’라고 하자.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필터링 없이 말을 내뱉지 말고, 남에게 애써 상처주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거, 결국 다 돌아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