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착각
안녕. 오늘 우리는 또 다투었네. 그것도 바보같은 이유로. 나는 네가 가자고 한 식당이 너희 집에서 너무 머니 내가 너희집 근처로 가겠다고 했고, 너는 자신의 추천을 무시해버린 내가 섭섭하다고 했어.
나는 사실 집에서 10분 이상 걸어야 하면 15분 거리나, 30분 거리나 모두 먼 거리가 되어버리거든. 그래서 나는 네 집 바로 앞에 있는 곳을 가자고 한 거였어. 너도 귀찮으려니, 하고 넘겨짚고 말이야. 반대로 너는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나는 배고프려니, 하고 생각해서 내 근처로 가겠다고 한 거였다고 말했지. 사실 나는 오늘따라 그닥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있잖아, 역지사지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같아. 너는 내가 아닌데, 내가 어떻게 네 생각을 전부 헤아릴 수 있겠어? 의도야 좋지.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는 건, 너를 나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니까.
그렇지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오만한 생각 아니겠어?
내가 아무리 애써 너의 입장에서 '내가 너라면'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건 너의 껍데기를 쓴 나일 뿐이잖아. 결국 '너는 이렇게 생각하겠지'하고 넘겨짚어버리는 게 되어버리고 말겠지.
알고 지낸 지 벌써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나는 너를 전부 알지 못해. 어쩌면 평생 함께해도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 사실 나는 오히려 너를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어. 맞잖아,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걸. 그게 나쁘다는 게 절대 아냐. 그러니까 너에 대해서 많이 알려달라는 뜻이야.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를 알 수 있도록. 네 입장이 된답시고 내 입장을 투영하지 않고, 완전히 너의 입장을 1부터 10까지 알 수 있도록. 나도 나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할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알아가자. 말하자면, 서로의 사고방식을 데이터를 통해 딥러닝을 시키는 거야. 그러면 내가 굳이 네가 되지 않아도 그 알고리즘이 네가 되어줄 테니까 말이야.
ps. 그래도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 너를 꼭 이해하고 알아야지만 너를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너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너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