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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톨 Apr 26. 2020

21세기의 박애주의자

더 효율적인 혁신을 추구하는 <인사이드 빌 게이츠>

가끔 나는 나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던 행운을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경험을 갖게 해 주시고, 외국어를 가르쳐 주시며, 내가 최선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셨던 나의 부모님. 틀면 콸콸 나오는 깨끗한 수돗물과 부담 없이 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의료 체계가 갖추어진 나라. 나이에 적절한 예방 접종을 맞아가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큰 불편함 없는 나의 몸. 그것이 행운이고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대학생 때에도 꾸준히 봉사를 해왔고, 사회복지재단에서도 짧게 근무한 적이 있다. 이런 관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최근 친구의 추천으로 <인사이드 빌 게이츠>를 보게 되었다. 빌 게이츠는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와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직 사임을 선언했다. 여전히 그에게 MS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세상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은퇴를 발표했던 링크드인의 글


사실 나는 어린이 시절, 처음 빌 게이츠를 부자의 대명사로 접했다. MS라는 회사의 존재나 윈도우는 알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인지, 그리고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무엇인지보다 빌의 자산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의 행보는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엘론 머스크처럼 민간 우주 사업이나 터널을 뚫어 교통 체증을 해결하겠다는 등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내는 사업가들에게 좀 더 매력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성을 무기로 사회를 혁신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무신론자인 내게 객관적인 데이터와 이성은 내가 믿는 유일한 개념이고, 그래서 나는 빌 게이츠에게 즉시 매료되었다.


"멜린다와 저는 종종 죽어가는 몇 명의 아이들을 볼 때 굉장히 힘들어해요. 하지만 그런 아이는 수백만 명이나 돼요. 그러면 수백만 배 더 괴로워야겠지만 한 명의 죽어가는 아이를 볼 때보다 수백만 배 더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감정적인 연결은 소규모로만 작용해요. 하지만 정말 이 분야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면 크게 생각을 해야 하죠. 10의 6제곱, 7제곱 규모로요.”
“Melinda and I often, you know, just find it very tough when you’re seeing a few kids dying. But then there’s millions like that. It should be a million times more emotional, but, you know, nobody can be a million times more sad than when you’re sitting there seeing that one case. But the emotional connection is always retail. Even though, if you really wanna make a dent in this thing, you better think wholesale in, you know, ten to the sixth, ten to the seventh type magnitudes.”


총 3화에 걸친 내용 동안 빌 게이츠의 생애와 그의 현재 사업이 교차로 나온다. 첫 화에서는 그의 가족과 화장실 오수를 정수하는 시스템, 두 번째 화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시작과 소아마비 예방 접종, 마지막 화에서는 그의 아내 멜린다 게이츠와 원자력 발전 사업까지. 그는 그러면서 데이터를 활용하며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고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솔루션을 낼 방법을 찾는다. 2억 달러를 써낸 리서치 팀에게 4억 달러를 지원하면서 어떻게든 해결해달라고 할 정도로 그는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선다.


감동적인 Inspiration보다는 현실적인 Optimization


빌 게이츠는 인간의 배변이 섞인 오수를 정수하는 기술에 나아가 이를 상용화 가능한 수준의 가격으로 떨어뜨리고자 한다. 소아마비 예방접종이 되지 않는 이유를 지리학에서 찾고, 위성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나이지리아의 지도를 다시 그려 애매한 행정 단위를 재정의하여 누락되는 아이들이 없게 한다. 그의 목표는 발병을 줄이는 게 아니라 0으로 낮추는 것. 또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는 오히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원자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완벽하게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소를 개발할 장법을 찾는다.




사회혁신에서 객관을 논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자연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숫자를 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참 매정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일수록 우린 더 객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필요한 곳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추천한 책인 <팩트풀니스>는 우리의 오해를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팩트풀니스Factfulness란 저자가 만든 단어로 말 그대로 사실에 충실하다는 뜻이며, '사실충실성'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왜 굳이 번역을 안 했을까 했는데 너무 단어가 딱딱하게 들렸을 것 같다)


저자 한스 로슬링은 스웨덴의 의사이자 보건 통계학자이다. 여기서 저자는 우리가 흔하게 저지르는 착각을 하나씩 언급한다. 세상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극단적이거나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개발도상국 / 선진국이라는 분류보다는 일일 소득을 기준으로 1단계부터 4단계까지 나눈다. 그렇게 나눠본 세상은 생각보다 큰 발전을 이룬 상태이다.


1965년도와 2017년도의 출산율/사망률 비교


여기서 그는 보급 가능한 솔루션에 집중한다. 병원에 올 수 있었던 소수의 운 좋은 아이들보다도 병원까지 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필요한 복지를 제공하는 방법을 찾는다. 모든 아이들이 최적의 치료를 받으면 좋겠지만 의료진, 의약품, 예산 등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 많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나는 복지 단체들이 비쩍 마른 아이들의 모습을 앞다투어 내세우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아프리카’라는 커다란 대륙을 뭉뚱그려 생각한다든가, 초등교육의 보급률을 무시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가. 문제에 너무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지나치게 과장해버렸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감정은 감정에서 그치지 않고 결정까지 휩쓸리게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20:80이라는 파레토 법칙을 언급하며, 때로는 20%에 해당하는 중요한 요소들만 바꿔줘도 결과의 80%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상황과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를 자극하는 충격적인 몇 가지 사실에서만 기인해서 생각하면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주제상 생략했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빌 게이츠는 정말 위대한 뇌를 가진 사람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프로그래밍을 하며 학교의 시간표를 구성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의 번호판과 주인을 모두 매치시킬 수 있었으며, MS를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다.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빌 게이츠는 누구와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든 상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공부를 좋아하고, 효율화를 사랑한다. 그는 출장을 갈 때마다 십수 권의 책을 챙기며 (실제로 비서가 책을 챙기는 모습도 잠깐 나온다) 아무리 길고 지루한 전문도서도 끝까지 끝내고 이해까지 해낸다. 이 장면 역시 생각이 참 많이 드는 장면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 역시 하루에 24시간만 주어지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매분 매초를 가득 채워서 살아낸다.


이런 그가 하는 사회혁신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빌 게이츠는 기술이야말로 자신의 도끼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문제는 못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 비유 역시 <팩트풀니스>에 나오는 말이다) 너무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토르에게 왜 망치만 쓰냐고 탓할 사람이 있는가? 토르는 망치에 특화된 사람이다. 그에게 몽키 스패너를 가르치느니, 망치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가 사회혁신을 비즈니스처럼 접근하는 것이 좋다. 언제까지나 사회혁신이 박애주의에서 나올 수만은 없다. '지속 가능성'이 필요하다. 기부금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취지만 좋고 효용성은 떨어지는 프로젝트들은 일회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수를 깨끗한 생수로 바꿀 수 있대도 모든 가정에 보급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으로 떨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말 그대로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가진 그가 진행하는 사회혁신 프로젝트들은 '사회환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단순하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을 기반으로 사회를 바꿔나가고 있다.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다음과 같은 빌 게이츠의 어머니, 메리 게이츠의 말로 끝이 난다. 빌 게이츠는 이제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나 억만장자라는 타이틀 외에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이사장이라는 타이틀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자신만이 아닌 세계 전체를 위한 도전이다.


우리는 모두 성공에 대해 스스로 정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그에 부응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죠. 결국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얻는지도, 심지어 무엇을 주는지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입니다.



"Each one of us has to start out with developing his or her own definition of success. And when we have these specific expectations of ourselves, we’re more likely to live up to them. Ultimately, it’s not what you get or even what you give. It’s what you be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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