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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톨 Jan 29. 2021

얕고 넓은 사람들을 위한 항변

2년 동안 정들었던 부서를 떠나 2년간의 TF 파견을 앞두고 있다. 이번 주 내내 하던 일을 마무리한다고 바빴는데 오늘 자리를 옮기고, 선배들과 평소처럼 점심을 먹으며 커피를 마시고, 다시 돌아올 거니까 점심을 자주 같이 먹자고 하고, 전배 메일을 썼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들었는지 아쉬움에 한참을 쓰고 지웠다.


나는 항상 덕질에 소질이 없었다. 누굴 좋아하려고 해도 이 노래가 나오면 이 가수가 좋고, 저 노래가 나오면 저 가수가 좋았다. 나도 뭔가를 덕질하면서 진득하고 깊게 파고들고 싶었는데 노력해도 덕질이 아니라 마치 숙제를 하듯 가수 이름을 외우고, 배우 생일을 외우고 그랬다.

좁고 깊게, 그게 나는 항상 잘 안 됐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도 수십 번 바뀌었다. 올림픽 철에는 양궁 선수가 되고 싶었고 동물농장을 본 날엔 사육사가 되고 싶었고 반기문 키즈를 꿈꾸기도 했다. 10년 후 나에게 쓰는 편지는 그 대상이 경찰이었다가 디자이너였다가 만화가였다가 외교관이었다가 마케터였다가 했다.

불안할 때마다 한바닥씩 쓰는 일기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계획을 세웠지만 그에 전혀 맞지 않게 살아왔다. 자의든 타의든 나의 장기 계획은 틀어졌고, 어쩔 땐 그게 결국 내 뜻밖의 취향을 찾아주기도 했다. 수능을 생각보다 못 보고 갑자기 정시로 들어온 지금 전공은 즐거웠고, 전환률 80%를 빗나가 떨어진 인턴직은 나를 이 회사의 정규직으로 이끌어주었다.


자의든 타의든 나의 장기 계획은 틀어졌고, 어쩔 땐 그게 결국 내 뜻밖의 취향을 찾아주기도 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느니, 꿈을 오래 꾼 자는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느니, 세상엔 좁고 깊은 사람들만이 부러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꿈을 자주 바꾸는 사람들은 종종 끈기가 없거나 근시안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게 아니면 안 되는 일을 찾은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지만 나는 얕고 넓은 사람들을 옹호하고 싶다. 대충대충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매사에 진심이지만 그 대상이 자주 바뀌는 사람들. 어차피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그렇다면 차라리 짧게 자주 목표를 바꾸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꿈을 선택한다고 내가 그 길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양자택일이나 제로섬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미래에 도움이 되더라. 재학 중 소질이 없다고 느꼈던 디자인 전공은 나를 디자인적 사고를 할 줄 아는 마케터로 길러주었고, 영문학도의 꿈을 키워준 영어 실력은 여기저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지만 숲도 결국 나무의 집합체다.


이 모든 게 불안한 나를 위한 항변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즉홍성이 상상도 못한 즐거움으로 나를 데려다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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