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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싶다 Mar 29. 2020

#생각 |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억하며

체코 프라하를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아직 해가 쨍쨍하던 늦은 오후, 현금이 필요해서 근처 ATM기를 찾아 다니다가 하나를 발견했다. 돈을 인출하고자 이것저것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등 뒤에 누군가 다가와 있음을 느겼다. 뒤를 흘끔 돌아보니 나보다 한 30cm는 더 커 보이는, 스킨헤드에 우락부락한 백인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ATM기로 시선을 돌려 하던 걸 마저 하려고 했지만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이 남자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돈을 훔쳐가려는 건 아닐까?"


백주 대낮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당시 내가 느꼈던 공포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 남성을 보면서 ATM 화면을 볼 수는 없기에 시선은 ATM에 두면서도 신경은 계속 등 뒤의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당연하게도, 혹은 다행히도 돈을 찾을 때까지 내가 우려했던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남성은 선량한 일반 프라하 시민 혹은 관광객이었는지, 나 다음으로 ATM에 서서 돈을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내달렸다. 아직도 그 때 그 남성이 등 뒤에서 내게 본의 아니게 주었던 위압감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나는 남자치고 그렇게 몸집이 큰 편이 아니다. 몸싸움도 해 본적이 없다. 아마 작정하고 덤벼드는 강도를 만나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밤길을 걷는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별로 없다. 내가 알기로 한국의 밤길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여자 지인들에게 들어보면 정말 별의별 일들을 다 겪는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그런 사실들을 들을 때마다 많이 놀랐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바라보는 밤길에 대한 생각의 차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에 대해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을, 혹은 대다수 한국 남성들의 생각에 경종을 울렸던 사건이 일어났었다. 강남역 한복판 유흥가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범인은 30대의 조현병 환자로 자신의 범행 동기를 '여성들이 자기를 무시해서'라고 진술하였다. 이 진술을 계기로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살해당한 이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여성들이 포스트잇을 통해 그간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대놓고 반감을 표출하였다.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마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 정신병자는 일부에 불과하며, 이런 식으로 남성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것은 오히려 서로간에 혐오감만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살해당한 이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굳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의견을 적절하였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단편소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일제강점기 시대의 소설가 계용묵은 수필 '구두'에서 밤길을 걷는 여성의 뒤를 따라 걷는데 '따악딱'나는 구두 소리 탓에 본의 아니게 오해를 샀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수필의 마지막에서 그는 이렇게 항변한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 한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계용묵 선생이야 100여 년 전 사람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 남자들의 생각도 100여 년 전과 비교해 많이 달라진 게 없는 것은 아닐까? 대다수의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각을 불편하게 느끼는 남성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를 원인을 먼저 따져보는 것이 남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로 인해 갈등이 생겼을 때, 오해는 누구의 잘못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해를 한 사람이 잘못인지, 아니면 오해를 하게 만든 사람이 잘못인지. 잘잘못을 가려내 시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오해가 발생하면 대화를 해야 한다. 서로가 동등한 관계에서 각자의 의견을 평화적으로 교환하는 그런 대화가 필요하다. 그럴 경우 오해를 해소하는 건 그나마 쉬운 편이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동등한 관계가 아닌 경우 이루어지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상명하복식의 대다수 한국의 직장 문화를 떠올려 보면 된다. 상사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부하는 그 아래에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는, 그렇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게 한국 직장 문화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아닌가. 권력 관계는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이러니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가운데, 권력을 가진 측이 남성인 경우 성범죄의 비율이 높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성폭력은 보통 성범죄가 일어나면 권력을 가진 측은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아닌 측은 강압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드러나는 경우보다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진 측이 행사하는 물리적, 사회적 폭력에 대처할 수단이 약자에게 딱히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본질적으로 성범죄는 강자와 약자의 사이의 문제로 살펴보아야 한다. 적어도 물리적인 면에서 여성은 약자의 측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할 것이며,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권력의 의지가 작동하는 순간 폭력으로 나아갈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시선을 오해이며, 오해한 측에 잘못이 있다고 몰아세우는 건 온당치 못하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일부 남성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일부 남성들이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비판을 계속해야 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게 아니라 일부 남성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오해를 하는 여성들이 아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남성 측에서 기본적으로 조심을 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야 한다.



100년 전에 비해 남자의 의식은 얼마나 달라졌나


이런 말이 남성들에게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행동을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는 게. 그것은 마치 100여 년 전 계용묵 선생이 말한 것처럼 남성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게 남자로서 억울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이는 어찌 보면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100년 전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문제점을 직시하는 교양을 지니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민주 시민의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그리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를 강자와 약자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이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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