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싶다 Jul 16. 2018

우리는 모두 굶주린 사람들

영화 <버닝>

    작가를 꿈꾸지만 비루한 현실 앞에 택배회사 알바를 전전하는 종수(유아인 분)는 거리에서 우연찮게 옛 초등학교 동창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그녀 역시 마트 앞에서 호객 알바를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수준. 동창이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낀 둘은 관계를 나누고, 얼마 뒤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녀가 없는 동안 해미가 기르는 고양이 먹이를 부탁받는 종수. 그녀가 여행을 떠나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애써 달래가며 지내던 중 드디어 해미가 돌아온다. 어떤 남자와 함께. 무엇을 하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벤(스티븐 연)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물질적, 정신적 여유 앞에 종수는 압도당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해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미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벤에게 토해내듯 내비치는 종수를 그저 헛웃음으로 대하는 벤은 해미와 함께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해미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고 그녀의 다락방은 깨끗이 정리된 상태. 당황한 종수에게 이제 남은 건 벤에 대한 의심과 해미의 행방에 대한 것일 뿐.  


    <버닝>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영화가 하나의 완성된 집이 아니라, 얼개만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막바지까지 주인공 종수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기 어려웠다. 좋아하는 작가로 윌리엄 포크너를 꼽는 종수는 기본적인 필력은 갖추고 있지만 무엇을 주제로 쓸 것이냐는 여러 사람들의 질문들에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와 시종 구부정한 자세, 지친듯한 표정이 가득한 그에게 기성 세대들의 이런 질문들은 폭력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 대척점이자 구원자로서 해미라는 캐릭터가 있다. 또렷한 눈동자와 넘치는 생명력,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는 종수의 지향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자신이 가진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저 지평선 너머 노을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한다. 이 틈을 벤이 비집고 들어온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망치러 등장한 것 같다. 그것을 의도했는지 아닌지조차 모호하지만 종수의 입장에서 그건 중요한게 아닐 것이다.  


    사실 내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이 영화의 느낌은 누구에게나 결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레이트 헝거와 헝거로 표현되는 단어들이 이를 상징한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벤조차 그렇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그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가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영화는 종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는 벤을 여러번 보여준다. 굳이 종수를 카페로 불러내서 해미를 옆자리에 앉혀두고 애정행각을 벌이면서도 벤의 시선은 시종일관 종수의 반응을 살피는가 하면, 해미의 이야기에는 관심없는 듯 애써 하품을 참아내면서도 종수에게는 미소 띈 얼굴을 보여주려 하는 등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에 대한 힌트는 종수의 헛간만큼이나 비밀스러운 벤의 집 화장실에는 종수네 헛간에서 본 것과 비슷한 상자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벤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화장도구는 종수에 대한 벤의 감정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해미도 종수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선택의 순간이 왔었을 때-종수의 낡아빠진 1톤 트럭 대신 벤의 포르쉐를 선택하는-해미의 선택을 보면 결국 해미가 원했던 바를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종수는 해미에게, 해미는 벤에게, 벤은 종수에게, 서로가 맞물리듯이 자신에게 없는 걸 찾으려 한 게 아니었을까?


    영화 막바지에서 종수는 해미가 떠난 자취방 안에서 끊임없이 타자에 몰두한다. 종수는 결국 자신이 갈구하던게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일까. 이 영화의 결말처럼 보이는 것조차 종수가 원했던 것인지조자 사실 알 수는 없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보다 훨씬 더한 범죄를 저지를 만큼 그 분노가 정당했는가에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모른다'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느낌을 무엇이라 정의한다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 시도인 것이기 때문인지도. 그렇기에 영화를 본 사람 저마다 해석이 다 다를 것이라는 게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 영화는 그냥 그렇게 보면 될 거 같다. 그냥 자기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솔직할 것. 그리고 마음에 너무 담아두지 말고 가끔은 해소시킬 방법을, 그리고 그게 스스로를 불태우는 걸 막는 길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장식품이었던 텀블러를 꺼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