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저널리즘 <슬립노모어>를 읽고
어느 추운 겨울, <연극>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전시공간은 서촌에 위치한 대안공간 사루비아 다방이었는데 한 사람씩만 입장할 수 있어 온 몸을 바르르 떨며 1시간 반 가량을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혼자 들어선 전시장 안은 무척 어두웠고 내가 서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 여자의 구두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곧 조명이 켜졌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약 12분간 배우의 노래와 연기를 감상해야 했다. '전시'를 기대하고 간 내게 전시 공간에서 펼쳐진 뜻밖의 '연극'은 여전히 신선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같은 전시를 보고 온 누군가는 내게 1분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기억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당혹스러움 때문에 미처 즐기지 못한 작품(? 혹은 공연?)을 보러 다시 방문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공통적인 의견은 전시공간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졌던 기대가 와장창 깨지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었다.
연극이란 단어를 떠올려보자. 무대, 무대 위의 조명 그리고 조명 아래의 배우가 차례로 생각난다. 객석에는 관객들이 차분히 앉아 극을 감상한다. 물론 배우가 객석에서부터 등장하거나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들과 호응하는 공연도 많아졌지만 일반적으로 연극은 시작과 끝, 무대와 객석의 분리가 비교적 분명한 장르다.
여기 일반적인 '연극'의 개념을 뛰어넘는 공연이 있다. 바로 영국의 실험극단 펀치 트렁크(punchdrunk)의 <슬립노모어 Sleep No More>란 연극이다. 뉴욕에 가면, 런던에 가면, 상해에 가면 꼭 경험해야 한다는 머스트 공연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을 읽자마자 '뉴욕에서 <슬립노모어> 경험하기'가 내 버킷리스트에도 (너무 당연히) 추가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관객에게 연극 <슬립노모어>가 특별한 경험이 되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극장을 '블랙박스'라고 부르며 어둡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강렬한 조명이 비치는 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슬립노모어>에는 흔히 생각하는 무대가 없다. 공연장 안에서 무대가 아닌 곳이 없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 것 같다. <슬립노모어>의 뉴욕 공연을 예로 들어보자. 맥키트릭 호텔은 <슬립노모어>의 전용 극장이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맥키트릭 호텔은 '극장'이 아닌 1939년, 경제대공황이 끝날 무렵 뉴욕 첼시 지역에 초호화 호텔로 지어졌지만 개장을 불과 6일 앞두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금까지 문을 열지 못한 비운의 호텔로 인식된다. 물론 맥키트릭 호텔의 비운은 허구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버려진 초호화 호텔이란 공간성은 관객의 상상력을 아주 강하게 자극하며 세심하게 연출된 공간은 관객을 공간에 완벽하게 몰입시킨다.
슬립노모어에서 관객들의 탈주는 거의 본능적이다. 무서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찾고 싶은 관객들은 재빨리 어디로 이동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움직인다 (중략) 슬립노모어 관객들은 언제나 자신이 있는 공간을 벗어나려 한다. 관객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하나의 플랫폼이라고 하자. 관객은 목적지를 정해 두지 않고 플랫폼과 플랫폼 사이를 움직이고, 관객의 이동 경로는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벡터(vector)의 선이 된다 - 전윤경 <슬립노모어> 중에서
6층짜리 건물 전체가 연극의 무대가 되며, 100여 개의 방에서 실시간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공연은 맨덜리 바에서 함께 시작되지만 곧 배우와 관객이 호텔 곳곳을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물론 어디로 갈지, 어떤 것을 볼 지 결정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된다.
<슬립노모어>는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몰입도 있게 즐겼던 연극의 개념을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움직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고, 실시간 변하도록 철저하게 설계된 극 안에서 관객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객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 배우를 만지거나 말을 걸지 않는 것이란 약속만 지킨다면 관객은 배우 바로 뒤에 서서 배우의 행동을 지켜볼 수도 있고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 대신 호텔의 이곳저곳을 관찰할 수도 있다.
객석에 앉아 무대의 이모저모가 궁금했던 관객이라면 모르겠지만 가만히 앉아 연극을 보는데 익숙했던 관객에게 슬립노모어의 공간 구성은 심리적인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객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을 옮기고 또 옮기면서 극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극에 점점 더 깊이 참여하게 된다.
연극 <슬립노모어>는 무언극이다. 배우들의 상태나 감정은 눈빛과 안무 그리고 제스처로 드러난다. 전 세계 관객들이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언어'의 장벽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가 없기 때문에 대사 없이도 다수의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것도 '명확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각기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같은 장면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은 모두 미묘하게 다른 해석을 하게 될 것이다. 언어를 통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딛고 선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슬립노모어는 관객과 관객, 관객과 배우, 관객과 공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 작용이 곧 관객의 경험이 되는 공연이다. 관객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간다는 점에서 테마파크의 관람방식과 유사하다. 여섯 층으로 된 건물 안에서 동시에 여러 공연이 진행되고, 관객은 그 공연을 선택적으로 관람한다. 관객은 단순히 이 테마파크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더듬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행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 전윤경 <슬립노모어> 중에서
관객 또한 '움직임' 혹은 배우와의 '거리'를 통해 무언의 대화를 이어간다. 자칫 일방향적인 관찰 공간이 될 수 있는 연극 무대와는 달리 <슬립노모어>의 공간은 관객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극의 언어로 자리매김시킨다. 대화가 오가진 않지만 작은 움직임 하나가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고, 극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제 맥키트릭 호텔에서 일방적인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 관객이 움직임 혹은 관찰로 호응하지 않는다면, 극단이 정한 룰을 깨고 대화(언어 사용)를 하거나 극을 방해할만한 행동을 한다면 <슬립노모어>는 본래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없다.
관객은 입장하자마자 가면을 받아 들게 된다. 가면을 쓰는 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부담이 되는 행위지만 이로써 관객들은 시선의 자유를 허락받는다. 수많은 가면들 중 한 명으로 개인을 숨길 수 있어 호텔 안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거리낌 없이 눈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면은 관객들에게 시선의 자유를 허락하는 동시에 가면을 쓴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함으로써 관객이 공연 속 주체가 되게 만든다. 연극 <슬립노모어>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 장르를 개척해왔다. 이머시브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진 환경을 제공하고 관객이 직접 이동하면서 창의적으로 내러티브를 완성하는 참여형 공연 형태를 일컫는다.
슬립노모어의 관객들은 펀치드렁크가 초대한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다양한 사건 속에 휘말리게 된다. (중략) 슬립노모어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수행자이고,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관객은 공연 속 세계의 주체로 거듭난다 - 전윤경 <슬립노모어>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모티브로 한 이 공연은 주인공 맥베스를 따라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관객의 선택에 따라서 어떤 지점에서 그 이야기 맥락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이제 경험은 관객의 몫이며, 관객의 선택에 따라 관객은 모두 다른 공연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몇 번을 다시 보게 되더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경험할 수도 있다. <슬립노모어>는 ‘보는’ 연극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경험’하는 연극을 완성시켰다. 이를 증명하듯 여느 연극과는 달리 좌석의 위치에 따라 티켓값을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극에 어느 정도까지 참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티켓값이 다르다고 한다. 연극 <슬립노모어>에는 수동적인 관객 대신 함께 극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개인의 경험이 존재한다.
책을 읽는 내내 연극 <슬립노모어>를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를 보러 가서 의도하지 않게 경험한 연극이 내게 지금까지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수동적인 관객이었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떤 이야기를 경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또한 직접 <슬립노모어>를 경험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5층 공동묘지로 꾸며진 공간 옆 오두막에는 배우가 선택한 단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누군가는 그 '한 명'이 되어보고 싶어 여러 번 공연을 보러 오기도 한단다. 이렇게 연극 <슬립노모어>의 매력은 개인에게 각기 다른 경험을 주는 것, 새로운 공간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을 체험하게 하는 것, 그렇게 관객이 연극의 주체가 되어 하나의 극을 함께 완성해 나가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뉴욕은 거대했고 분주했다. 다시 뉴욕에 가게 된다면 제일 먼저 맥키트릭 호텔의 입장권을 끊어야겠다. <슬립노모어>의 경험은 분명 뉴욕에 대한 내 인상마저 바꿔놓을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