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쥬엘리 Jul 18. 2021

지난 새벽, 돌아가신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로또 1등 되게 해 주세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까지 함께 살았던 친할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같이 살았다지만 살갑고 다정한 기억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같이 살 때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엄마가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시집살이 당했다던 얘기만 줄 곧 해왔기 때문에 할머니는 나에게도 그러한 존재였다. 결혼하기 전까지도 일 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보는 게 고작이었고 그런 날마저도 일 때문에 바쁘다며 가지 않은 날도 여러 번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지 100일쯤 됐을 때였다. 사촌 오빠 결혼식에 갔는데 할머니께서 아이 낳느라 고생했다며 용돈을 주셨다. 설날에야 세배를 하고 용돈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누구나 주는 거였으니 의미가 크진 않았고, 살갑게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던 할머니가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등을 쓰다듬으며 봉투에 담긴 돈을 주시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해 버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이를 예쁘게 바라봐주신다거나 안아주시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게 내가 아는 할머니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작년 가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고 급히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코로나로 인해 문상객도 없이 아들 딸들과 손자, 손녀들만이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그제야 나이 든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할머니는 나에게 살가운 적 한 번 없었고 엄마에게 시집살이를 시켰던 존재, 밉진 않아도 사랑할 순 없었던 사람, 하지만 항상 말끔했고 건강하신 줄만 알았던 분이었다.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도 할머니가 나이 들어가는 것은 몰랐다. 그렇게 미움도, 사랑도 없던 나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던 지난 새벽,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꿈속에 찾아오셨다. 어느 호텔에서 9층으로 갔더니 10층으로 가야 한다며 1003호를 알려줬고, 그 안에서 할머니가 숫자가 적혀있는 쪽지를 주셨다. 3, 9, 10, 1003..... 그리고 잠에서 깼다. 아... 더 자야 했는데 깨버렸다.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급히 번호를 메모해 놓고는 남편에게 오늘은 로또를 사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남편이 피곤한지 일을 하다가 졸고 있다. 나는 그동안 로또 명당을 찾는다. 자그마치 1등 19번 당첨이란다. 집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는 거리. 그 정도면 갈만하다.

하지만 남편이 도통 일어나질 않는다. 오후 8시에 마감이라 급한 마음에 남편을 깨웠다.



"아! 로또 사러 가야지"

"미안, 8시 마감이라."

"아니야, 사러 가야 돼."


옷만 후다닥 입고 로또 명당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던 남편이 신이나 호들갑을 떤다.


"로또 되면 나 차 사줄 거야?"

"그럼. 사주지."


유턴을 하니 로또 명당이 저기 보인다. 간판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한참을 줄 지어 선 차들이 우측 깜빡이를 켜고 로또 명당 앞에 주차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지 못할까 마음이 급하다. 주차요원이 두 명이나 있는 로또 명당. 난 이곳에서 꼭 로또를 사리라.


주차를 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가게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알려주신 번호 세 개와 나의 촉으로 이루어진 번호들로 네 장을 사고 자동으로 여섯 장을 샀다(경험해본 결과 로또 명당들은 자동이 잘 맞는 편이었다). 거기다 연금복권 다섯 장까지 총 1만 5천 원어치.


'설레발치지 말자'는 나의 모토에 따라 로또 방송은 패스. 그냥 가볍게 산책을 다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홉 시가 넘어서 로또를 꺼냈다. 두근두근두근.


남편에게 말도 없이 몰래 여섯 개의 로또 번호를 확인하고 열 개의 로또를 일일이 형광펜으로 칠했다. 3, 6, 17, 23, 37, 39... 하, 5등 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도 열 개 모두!





우리 친할머니는 왜 오신 걸까? 내 꿈속에 왜 다녀가신 걸까? 무슨 이유가 있긴 하셨을까? 꿈속에 그 여인은 우리 할머니가 맞기는 하셨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얼마 후, 남편이 일을 하다 거실로 나와 물었다.


"어떻게 됐어?"

"하나도 안 됐어."

"거짓말하지 마, 혼자 먹을라고 숨겨놨지?"

"뭐래, 거기 있으니까 맞춰보든가."

"에잇, 차 못 사겠네."


우리의 꿈은 그렇게 날아갔다. 역시나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나 보다. 아, 우리에게는 연금복권이 남아있구나. 오늘부터 물 떠 놓고 할머니께 기도를 드려야겠다. 1등, 2등 다 당첨되게 해 주세요. 제발.







매거진의 이전글 겁쟁이의 자전거와 킥보드 도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