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이라는 이름의 회복력

어느덧 브런치 10주년


2015년 10월. 반듯하게 늘어선 가로수 머리 위로 붉고 노오란 물감이 물들기 시작하던 그때. 나는 세상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섬세히 느끼고 있다면 하루하루를 잘 살고 있는 증거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게 끝이 있는 터널인지, 더 늦기 전에 돌아나가야 할 막다른 길인지도 알 수 없는, 그래서 계절조차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막막한 시절이었다.


졸업 후, 기세 좋게 지원했던 광고 회사들로부터 줄줄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서류에서 광탈하든 최종면접에서 아쉽게 떨어지든 마지막에 듣는 말은 비슷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카피라이터 신입 자리에 나를 채워 넣을 만큼 특별한 이력이 없다는 것. 특별하다는 게 대체 뭘까. 알려주기만 하면 몇 개월이라도 쏟아 어떻게든 만들어올 텐데. 카피라이터 직종에 유리한 국문학과나 문창과, 철학과 출신이 아니라는 데 콤플렉스가 있던 터라, 당시에 할 수 있는 대외활동들로 빈칸을 꽉꽉 채웠는데도 특별한 이력이 없다는 건 내겐 사형선고 같았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반드시 원하는 결과가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뼈아프게 깨달은 매운맛의 가을이었다.


결국, 나는 길을 조금 틀어보기로 했다. 달리던 차선에 너무 많은 차들이 쏟아져 들어온다면 길을 조금 돌아가보는 것도 방법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 문을 두드린 곳에 귀인 같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명 매거진사에서 15년 넘게 에디터 경력을 쌓은 사람이 사수가 되었고, 디자이너 출신이지만 나보다도 더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 맞은편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어느 화창했던 오후, 그녀들은 내 손에 새로운 운명을 쥐어주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새로 생겼다는데, 너랑 잘 어울릴 거 같아. 거기 글을 좀 써보면 어때?'"


그날 이후, 나는 수시로 이곳을 들락거렸다. 마음이 몽글몽글한 날보다 마음이 어수선한 날엔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깜빡거리는 커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한 문장, 두 문장을 채우고, 수북이 쌓인 문장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듬다 보면 내 마음도 어느샌가 가지런해졌다.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마치 밀린 대청소를 끝낸 마냥 홀가분하게 정돈됐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썼을 뿐인데 이런 글을 써줘서 고맙다는 누군가의 댓글을 받는 날이면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잘 수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기분을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였다.


그토록 원하던 카피라이터라는 이름과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나는 그날의 기분을 금세 떠올릴 수 있다. 10년이란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고, 또 새로운 고민들이 줄줄이 기다릴 게 뻔한 인생이지만, 결국은 다 괜찮아지는 시기가 온다는 걸 안다. 나에겐, 그리고 이곳 브런치에 있는 모두에겐 '글'이라는 회복력이 있으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해냈던 기억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