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재는 파타피지컬하다.
최근 <유병재 그리기 대회> 수상작이 발표됐다. 유병재 그리기 대회는 ‘유병재 스탠드업 코미디쇼 <B의 농담>’ 개최 기념으로 진행한 행사다. 이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사생대회라기 보다, ‘유병재’라는 인물을 패러디하고 희화화하여 재미를 유발하는 장난스런 놀이에 불과하다. <유병재 그리기 대회 중간점검 “명화의 발견”>라는 유튜브 영상에 따르면, 3,000점이 넘는 그림이 출품됐다고 한다. 어떠한 부와 명예를 담보하지 않는 대회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기꺼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할애하여 그저 재미 혹은 유희를 추구할 뿐이다.
단지 유희만을 추구하는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의 재림이다. <호모 루덴스>(1938)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가 말하길, 우리는 본래 유희와 놀이를 추구하는 호모 루덴스였다고 한다. 우리 문명이 놀이 속에서 놀이로 전개됐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철학 역시 놀이의 형태였다. 수수께끼의 지혜 문답 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핑크스 신화다. 중세 시대에 빈번히 일어났던 전쟁 역시 그들이 설정한 규칙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종의 놀이 형식을 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냉철한 이성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이 세계에 들어서기 전, 우리는 감성과 유희가 앞서는 호모 루덴스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호모 루덴스의 ‘재림’이라 표현한 까닭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금 우리에게 발현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이성이 각광 받고, 중세 이후에 궁정 문화가 시작되면서 즉각적인 전사적 판단보다 냉철한 정치적 판단이 생존에 유리해졌다. 이른바 ‘생각하는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가 ‘루덴스’에 앞선 시대였다. 이후 시민사회와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말미암은 상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가 도래하니, 경제적 이해관계가 생존의 필수가 돼버린 ‘경제적인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등장했다. 두 인류 모두 노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놀고 싶어 하는 욕망도 사라진 인류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노는 것보다 돈 버는 게 더 재밌고, 멋지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호모 이코모니쿠스였음을 시사한다. 그랬던 것이 인터넷의 가상 세계와 모바일 디바이스라는 접근성이 결합된 새로운 디지털 시대가 등장하며 그 양상이 바뀌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는 단지 유희만을 위한 행위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우리는 이를 위해 기꺼이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고 있다. 호모 루덴스가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오늘날 호모 루덴스가 또 한 번 놀이의 장을 연 것이 바로, <유병재 그리기 대회>다.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루덴스 종의 유희의 현장이었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일종으로 본다. 이는 프랑스의 극작가 알프레드 제리가 만든 용어로, 20세기 중반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놀이다. 이는 ‘농담으로서의 철학’을 의미하는데,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위징어 역시 “놀이가 진지함이 되고, 진지함이 놀이가 된다. 놀이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높이를 획득하여 진지함 따위는 저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이는 파타피직스가 추구하는 미덕을 정확히 짚어준다.
<유병재 그리기 대회>를 주최하는 유병재나 그림을 그린 참가자들은 모두 진지하다. 그것이 장난이지만, 진지하다. 이들은 진지하지만 더욱 진지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 지점에서 재미를 느낀다. <유병재 그리기 대회 중간점검 “명화의 발견”>라는 영상은 우리가 고상하고, 그래서 진지해야만 하다고 여기는 미술관임을 가정한다(실제로는 집인 듯). BGM으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나오며 그 진지함을 더한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앉아 있는 유병재나, 그 옆에 서서 중간점검을 진행하는 매니저 유규선의 진지함을 가장한 행동들은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중간에 매니저 유규선이 “이곳은 정숙한 자리입니다.”라며 유병재를 제재하는 장면에서 터지는 재미는 파타피직스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아주 진지하게 출품작들을 미술사조에 빗대어 해석하며,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낸다. 인상주의 화가 고흐의 화풍이나 추상미술의 아버지 몬드리안 등의 작업을 닮은 출품작들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며 재미를 유발한다. 그 놀이 안에 진지함이 유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우병우를 그린 작품을 소개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유병재 그리기 대회>가 진지함을 가장한 놀이 행위라는 파타피직스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풍자성을 지닌 패러디의 영역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유의미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상과 이 대회는 디지털 시대를 향유하는 오늘날의 호모 루덴스가 어떻게 놀며 유희를 쟁취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문화 현상의 선두에 있는 유병재는 우리 시대에 앞서가는 파타피지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