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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Apr 27. 2018

우연이 모여 역사가 된다 <4.27남북정상회담>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부끄럽게도 내 게으름을 먼저 고백한다. 보통은 오전 열시나 돼야 일어나는데, 오늘은 7시 언저리에 일어났다. 알람을 맞춘 것도 아니고, 이때 일어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일어났다. 빈둥대다가 우연찮게 티비를 틀었다. 티비는 내게 오랜 친구 같다. 어렸을 적엔, 이놈과 하루 종일 붙어 지냈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시선을 뺏겨 한동안 멀어진, 그런 사이다. 오늘은 왠지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제쳐두고 티비 앞으로 갔다. 때마침 남북정상회담이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였고, 그쪽으로 성큼 걸어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였다. 둘은 악수를 했다. 이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북쪽으로 데리고 갔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장면과 그 소리에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친할머니는 실향민이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의 처녀 시절 사진을 봤다. 당시에 사진을 찍었다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그 사진 속에는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그 시절에 비키니라니. 북쪽 집에는 연못이 딸린 정원이 있었다는 부연 설명이 그 심상치 않음을 이해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끝끝내 그곳에 다시 가보진 못하셨다. 앞서 ‘이었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보다 멀리 가버리셨기 때문이다. 티비를 보면서, 어쩌면 할머니를 대신하여 나는 그곳에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오랫동안 방명록을 남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 내용이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인 것을 보니, 헛된 기대만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의 평화통일을 외치면 빨갱이로 몰리던 북진통일 시대(이승만)를 지나, 숨어서 남북 최초의 공동성명(박정희)을 해야만 했던 그 시절을 지나,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만나고(전두환), 남북 고위급 회담(노태우)이 열리더니만, 종국엔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게 됐다. 2000년 6월 15일(김대중)과 2007년 10월 4일(노무현)의 정신을 이어 받아, 2018년 4월 27일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김정은 위원장이 그동안 북한 정상이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과 발언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회담이 더욱 기대를 받고 있다. 엊그제 예비군을 다녀왔는데, 이제 예비군이 사라질 날을 기대해 봐도 되는 것일까? (예비군 창설은 1968년 4월 1일 됐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무장 공비가 청와대까지 내려온 사건이 빌미가 됐다. 예비군을 두 달에 걸쳐 네 번이나 가면ㅡㅡ, 저절로 외워지는 정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당시 구 동독의 여당이었던 독일사회주의 통일당의 지도부 권터 샤보프스키의 “라잇 나우!” 발언으로 촉발됐다. 구 동독 정부의 여행자율화 방침문건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기자가 갑작스런 질문을 하자, 그는 서독으로의 여행이 지금 당장부터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삽시간에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날 새벽 장벽은 무너졌고, 동서로 나뉘었던 이들은 부둥켜 앉았다. 그리고 이듬해 90년, 독일은 통일됐다. 내가 오늘 평소와 다르게 일찍 일어났고, 우연찮게 티비를 틀었으며, 때마침 남북정상회담을 본 기막힌 우연들. 개인의 우연이 모여 공동체의 필연이 되고, 그 필연은 역사가 되지 않던가. 지금 평화의 집에서 한반도 역사에 획을 그을 이야기들이 오고갈 텐데, 긍정의 우연이 그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퍼져 새로운 역사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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