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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영 Jan 01. 2024

2023 연말 결산

약간의 소회와 회고를 곁들인

3M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실수로 접착력이 아주 약한 접착제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이 접착제를 쓸 만한 곳을 찾으려 5년 동안 노력했지만 쓰임새를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3M의 다른 직원이 성가대에서 노래할 때 페이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사이사이에 종이를 끼운 찬송가 책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종이를 와르르 쏟은 적이 있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앞서 말한 접착제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3M의 엄청난 히트작이자 위대한 발명품인 ‘포스트잇’이 탄생했다.

연말연시, 성공을 기원하는 말이 많이 오간다. 성공은 좋은 것이겠으나, 실패를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근사한 실패는 실패가 아니며, 우리는 모두 거대한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 근사한 실패, 거대한 과정 김하나 저자·카피라이터


장장 6개월 만의 브런치 글 발행이라니 조금 어색하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 지조차 막막해서, 방문한 김에 브런치에서 구독 중인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몰아 읽었다. 플랫폼 이탈 예정 고객에게 발송되는 듯한, 절절한 브런치 앱 푸시 문구를 가볍게 무시하고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나와 달리 대부분의 작가님들은 자리를 지키며 꾸준히 글을 발행 중이셨다. 그저 존경의 마음을 담아, 빈지워칭 대신 빈지리딩으로 여는 새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는 동안 개인 블로그에는 나름대로 소소한 일상 속 이야기들을 써 올리고는 했는데, 그마저도 서로이웃 공개이기는 했다. 예전에는 노출된 공간에 글을 써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을 테고, 아닌 사람은 지나가겠지. 필요에 따라 소비되고 자연스레 휘발되겠지.' 정도의 생각이었다면, 올여름부터는 이상하고 막연한 공포감이 일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담벼락에다 공개된 일기장을 쓰는 기분이었다. 그 담벼락이 큰 길가에 있던, 골목에 숨겨져 있던 관계없이 그런 기분을 스스로 느꼈다는 게 중요하다. 나 스스로 간직한 생각마저 불필요한 소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모종의 위험 신호였다.



2023년, 올해의 새로운 루틴 <모닝 페이지>


한동안 그런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제는 작년이 되어버린 겨울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이른 새벽에 기상해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다. 칼 융의 심리학에 따르면 '기상 직후 45분'은 방어기제가 동작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한다. 무방비해지는 시간을 활용해 떠오르는 감정들이나 생각들을 무작위로 써 내려가보는 경험들을 하고 있는데 마치 글로 하는 명상 같달까? 멘탈 케어에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굳이 새벽일 필요 없이 기상 직후에 하면 된다.)


직업인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역량이자, PM에게는 더욱이 중요한 숙제가 바로 Self-motivation이다. 인센티브나 승진, 고과와 같은 외적 동기부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내적 동기부여인데 올 한 해 동안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이 많았다. 업무 중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의사결정과 설득의 과정 속에서 균형을 잘 잡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스스로에게 관용을 베풀고 너그러워지는 것도 때때로는 중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껄끄러운 마음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내 에고와 상황은 잠시 떼어놓고 바라보되,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 / 다음에는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를 믿어주고 응원해 준다면 그 믿음이 차곡차곡 쌓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셀프 동기부여는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평생에 걸쳐 풀어내야 하는 숙제 중 하나다. 2024년에는 부디 더 지혜롭고 현명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올해의 카페, 서촌 나흐바


연말 결산이니까 조금 가벼운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아서. 올해도 작년과 같이 무수한 카페를 다녔고, 그만큼 맛있는 커피도 많이 만났다. 그 많은 후보들 중에서 딱 한 곳을 꼽자면 서촌 나흐바! 개인적 취향이지만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먼저 마시고, 필터 커피를 주문하는 편인데 (일종의 웜업) 이곳의 라떼는 스팀 온도가 딱이다.


좁지도 그리고 넓지도 않은 내부 공간 역시 따스하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데, 빛이 잘 들어오는 통창을 통해 본 필운대로뷰는 꽤나 낭만적이다. 여러모로 사장님의 센스가 돋보이는 가게다. 여름인가, 가을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시나몬롤도 소위 폼이 끝내준다. 오바 안 섞고 태어나서 먹어본 시나몬롤, 번 중에 가장 맛있었다. 웨이팅이 길어져 이제는 자주 못 가게 되었지만.. 올해의 카페로 꼽기엔 손색이 없다.




조금 아쉬워서 덧붙이는 망원동의 한강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가게 중에서는 이곳이 국내 탑티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수준 높은 맛을 보여주는 가게인데 멀어서 많이 못 갔다. 세상의 끝 망원.. 한강에스프레소의 베스트 메뉴는 시트리코!





올해의 소비, 코네 헤븐 소파


올해 가장 큰 소비이자, 잘한 소비는 소파를 산 것! 지금껏 자취하면서 집이 좁다 보니 소파를 놓아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조금 더 넓은 평수로 가게 되면서 3인용 소파를 들였다. 집에 놓을 적당한 소파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는데, 결국 낙점된 소파는 코네의 헤븐 소파였다. 처음엔 이름에 혹해서 한 번 앉아봤는데 (얼마나 편하면 이름이 헤븐인가 싶어서) 진짜.. 천국 그 자체..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할인받고 사서 반년 째 쓰고 있는데 여전히 대만족이다. 심미성도 중요하지만 역시 소파는 편해야 한다. 앉았을 때 '이거다!' 싶으면 사야 하는 게 소파다.





올해의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전체 쪽수가 약 121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책을 완독 하는 데까지 약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적은 분량이 무색할 정도로 문장 문장마다의 밀도가 높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민과 현실, 그 속의 부조리함을 잘 담아낸 책이지만 사회 고발 그 이면에 있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성찰, 사랑으로 엮어낸 결말이 비로소 이 책을 완성시켰다고 믿는다. 무언가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 그 작품을 주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고 싶은 기분이 될 때가 있다. 이 책도 그랬다. 한동안 에세이에 파묻혀 지낸다고 잊고 있었다. 소설은 이런 재미로 읽는 거였지.



올해의 새로운 시도, 이사와 이직

올해는 개인적으로도, 커리어 면에서도 큰 변곡점이 된 한 해였다. 위에서 살짝 언급하기는 했지만 전세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원래 살던 잠실을 떠나 조금 더 동쪽으로 이사를 했다. 계약 만료 시점이 전세 사기 사건으로 흉흉했던 시점이었기에 마음고생은 깨나했으나 무사히 전셋집을 빼고 나올 수 있었고, 지금은 전에 살던 평수보다 조금 더 넓은 평수로 이사해서 공간을 꾸미는 재미도 다시금 되찾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회사는 출근지가 판교에서 강남으로 바뀌었는데,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은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싶다. 조직 구성이나 업무의 R&R에도 (체감상)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연말 회고에 적기에는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서 다음 기회에 다른 글에서 다뤄보기로!


이사 시점과 이직 후 적응 시점이 겹쳐서 더 정신없이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한데, 좋은 동료와 룸메이트를 만난 덕분에 소프트 랜딩에 성공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많은 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의 음악, 은 좀 많은데..

시티팝 부문 : Taeko Onuki - 4:00 am

https://www.youtube.com/watch?v=_sOKkON_UnQ


포크 부문 : 최유리 - 숲

https://www.youtube.com/watch?v=7ihLv8_Vd-4


소프트락 부문 : Mitski - My Love Mine All Mine

https://www.youtube.com/watch?v=vx4kLgnFexo



올해의 앨범, Darius의 Utopia

앨범의 전곡이 모두 훌륭하지만 가장 즐겨 들었던 곡은 Night birds! 한동안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곡이다. 일하면서 노동요로 듣기에도 좋고, 퇴근 후 휴식을 취하면서 들어도 좋고, 심지어 샤워하면서 듣기도 좋다. 어슴푸레한 새벽, 차고에서 새어 나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연상시키는 곡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F3Lk4qGbLNeUnNVBhIQyFpgwRyoQ8lvQ



연말 회고에는 생략되었으나 2023년 한 해 동안 안팎으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마침표를 찍고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직 정리가 더 필요한 일들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잘 갈무리 지으려 한다. 새해도 내 역할과 몫을 충실히 다할 수 있도록 슬슬 워밍업에 들어갈 시간인 듯 싶다. 새로운 2024년은 개인의 삶에서나, 커리어 면에서나 조금 더 성장하는 한 해가 될 수 있길 기원하며!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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