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바다를 보며 다정함을 배운다.
숨을 쉬기 위해 찾아왔던 바다
10년 정도 지났을까. 처음 기차 여행을 계획하면서 6박 7일의 여행의 끝을 강릉으로 잡았다.
늘 부모님의 손을 잡고 왔던 강원도 여행을 성인이 되어 혼자 온다는 게 꽤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부산에서 강릉까지,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산에서 아침에 출발한 기차는 겨울의 저녁이 되어서야 강릉역에 도착했던 기억이었다. 강릉의 차가운 공기에 코끝은 시렸지만 괜스레 미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스스로 강릉에 오다니! 이제 어른이 되었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작은 파티를 하고 크리스마스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강릉에서 더 있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집으로 향했다. 행복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기차 여행의 끝자락이 강릉이었다
"커피거리에 다녀 갈까?"
함께 여행을 했던 친구와 함께 안목 해변에 처음 와본 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카페가 있기보다 정말 아름다운 바다 앞에 몇 개의 카페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없이 푸른 겨울 바다를 보며 그저 바다에 대한 사랑이 생겼던 것 같다
수도권에서 몇 시간이면 아름 다운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강릉이라 친구들과 짧은 여행으로도 강릉을 자주 찾기도 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질 때마다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곤 했다. 어떤 날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이 답답해 눈물을 흘리며 강릉을 찾은 날도 있었고, 바다의 힘을 얻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강릉으로 흘러 오기도 했다
바다에 마음을 흘려보내고 더 잘 살아가고 싶어서.
그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숨 쉬고 싶어서 찾은 곳이 강릉이었다.
정말 사주에 火가 많아서일까. 바다만 보면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바다를 보면서 무거웠던 마음은 파도에 흘려보낼 수 있었고, 차가운 바람은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마음이 온갖 감정들을 흘려보내지 못해 무거워 짐을 느낄 때마다 나는 늘 바다를 찾았다.
처음 찾았던 강릉을 이어 부산 바다를 찾게 되었고 그다음은 제주 바다를 만나러 툭하면 떠나곤 했다
늘 바다 곁으로 떠나는 나에게, 유독 제주 바다로 떠나는 나에게 사람들은 늘 물었다.
'아직도 제주에 볼게 남아 있어?'
'그럼! 제주도는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사람들에게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살기 위해 바다로 떠났다
누군가에게 내 진심을 이야기하는 게 두려워 혼자 만의 세상을 만들어 떠난 곳이 다름 아닌 '바다'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마음들을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이야기하기보다 바다를 마주하며 나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어떤 이유 때문에 이런 마음들이 가득 찼는지. 앞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제주에서 만난 풍경 덕분에 우연히 마주했던 사람들 덕분에 다정함이 피어오르는 날들이 많아졌다
진짜 혼자가 되어 바다를 마주한 날들이 많아졌고 나는 바다 곁에서 더 나다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고, 내 감정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저 지금 내 감정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감각이 나를 자꾸만 바다로 이끌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자꾸만 바다를 찾았던 이유는,
더 잘 살고 싶어서. 더 다정하게 살고 싶어서. 진짜 나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만에 강릉에 왔고 이번에는 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오니 보이는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바다 곁에서 살고 싶은 걸까?'
'강릉에 살고 있는 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신 걸까?'
오랜만에 마주한 강릉 바다 앞에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다를 마주 하고 있는지.
내가 왜 바다 곁에서 살고 싶은지 다시 한번 마음을 꺼내어 보는 중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늘 한결같은 바다 앞에서는
"네 속도 대로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바다를 보며 나만의 리듬,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기 위한 시간의 용기를 내본다.
도시에서는 늘 내 속도 보다 사람들과의 속도에 맞춰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배운다
이 나이에는 취업을 해야 하고, 이 시기에는 연애를 하며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세상은 말한다. 세상이 말하는 속도로만 보면 늘 느렸던 나는 도시에서 늘 조급했고 불안함을 느꼈다.
여전히 너는 너무 느리다고 이야기하는 세상을 등지고 바다 곁에 오면 유독 차가운 바다 앞에서도 다정함을 느낀다.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는 바다는, 네 모습으로 살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네가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다고.
바다 곁에서 늘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윤슬이 가득했던 책방 윤슬서림에서 마음을 더 말랑말랑하게 하는 문장을 만났다.
사랑은 장면을 남긴다
사람은 잊혀도 장면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밤하늘의 별을 따라 무작정 걸으며 이야기했던 밤, 밤 산책을 하다 사진을 찍고 있던 내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기록해 주던 밤, 정말 먼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와 함께 걷던 밤. 경주역 앞에서 맥주 한 캔 사들고 불편한 자리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워 가던 밤. 사람은 잊혀도 장면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곁에서 사랑을 떠올렸고,
바다 곁에서 내 마음을 한번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결같은 바다는 늘 내게 다정하구나.
날씨가 좋아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늘 한결같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바다를 보며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어쩌면 다정함이 낯설어진 세상에서,
다정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바다를 보며,
나를 배우고 삶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