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감옥에 오랜 기간 갇혀있었다. 인간관계 속에서 받았던 상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어린 자녀를 둔 늙은 가장의 중압감.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던 이런 심리적 족쇄들은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을 옥죄어 왔다. 특히 쉽사리 다스리기 힘들었던 감정이 있었다. 잊힐만할 때면 불쑥불쑥 찾아와 애써 찾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이 불청객. 바로 '열등감'이었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팔매질을 했을 때 그 파문이 오래가듯, 한번 열등감을 맛볼 때마다 느끼는 후유증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항상 뭔가 애매했다. 고교 때 성적도 중상위권이었고 대학도 수도권의 공대를 나왔다. 학벌 세탁을 하듯 상위권 대학원으로 진학했지만, 박사 학위를 마치는 데에 5년 반이나 걸렸다. 대학원 시절 산학협력 인연으로 삼성에 들어갔지만, 11년 동안 상용화 같은 큰 실적을 내 본 적도 없었다. 연구소에 가득하던 A급 인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처세술이나 좋은 대인관계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열등감을 늘 달고 살았다. 학부시절엔 코딩을 잘하는 친구를 부러워했고, 대학원에서는 본교생이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어렵사리 들어간 연구소에서는 국내외 명문대학 박사들의 명석함, 좋은 대인관계를 갖고 있는 동료들의 사회성을 늘 부러워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학벌이 무슨 상관이야, 능력 있고 일만 잘하면 되지!"
이렇게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학벌이 곧 능력이었다. 탑티어 학교 출신이 더 똑똑하고, 일도 빠르고, 구현도, 발표도 잘했다. 이런 인재들이 중용받는 것은 당연했다. 임원들은 해외 연구소와 함께 진행하던 중요 프로젝트를 이들에게 맡겼다. 실리콘밸리 출장을 떠날 때면 이들이 늘 함께했다. 가끔씩 발생하는 T/F 차출, 팀장 대리 등 덜 중요하고 애매한 일은 애매한 인력이었던 내게 돌아왔다. "네가 이 분야 전문가잖아?"라는 영혼 없는 칭찬과 함께.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임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조직을 이끌다 보면 현시점에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자신의 가진 카드 중에 가장 좋은 패를 써야 한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한가롭게 조직원 개개인의 선호도를 물어가며 일을 진행시킬 수 없다. 그저 그 시점에 발생한 일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인력에게 그 일을 맡긴 것뿐이다.
문제는 한번 이러한 부서장의 총애 리스트에 들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는 소위 말하는 '핵심 인재' 중심으로 돌아간다. 초일류 연구소를 유지하기 위한 철학은 바로 '인재 경영'이었다. 그 인재 풀에 들지 못했다는 소외감은 열패감으로 이어졌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이런 어두움은 나를 더욱 무너뜨렸다. 직장에서 꾹꾹 눌러놓았던 슬픔은 밤늦게 퇴근해 잠든 돌배기 딸아이의 얼굴을 볼 때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이런 아빠라 미안해"
나는 채워지지 않았던 인정 욕구를 외부에서 분출하기 시작했다. 내 일, 연구, 능력, 커리어가 과연 그토록 쓸모없던 것인지 시험하기로 했다. 새벽마다 영어학원을 다녔고, 악착같이 연구 성과를 논문으로 작성해 발표했다. 그 억척스러움 탓인지, 회사가 아닌 외부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쥐톨만큼 쌓은 인지도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 오면 이 지긋지긋했던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A급 인재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으니까.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의 연구원이 되었다'라는 우월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 작은 안도감이 그간 가졌던 열등감을 상쇄시켜 주길 원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한동안 나는 열등감에서 자유로웠다. 이곳은 한국에서보다 더 대단한 인재가 득실댔다. 고개만 돌리면 전 세계로부터 온 천재들이 유창한 영어로 능력을 뿜어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들에게는 아무런 비교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문화와 언어 장벽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내가 걸어온 길을 비교하는 것마저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교하는 것을 포기했다'라는 말이 맞을지 모른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 순간,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이민자가 된 셈이니까.
하지만 미국은 한국과 차원과 스케일이 다른 나라였다. 열등의식은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세속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커뮤니티, 자녀들 학교, 교회와 같은 곳에서 현지 한국인들과 만남을 이어갔을 때, 부지불식간 이들과의 '비교 의식'은 다시 돋아났다. 이곳은 한국보다 훨씬 많은 빅테크 기업, 스타트업이 운집한 곳이기에, 그만큼이나 이들의 나이, 스펙, 소득 수준의 스펙트럼도 넓었다. 누구는 한 달 생활하기도 힘들다고 했지만, 누구는 'RSU 대박', '스타트업 엑싯'으로 돈방석에 올랐다고 했다. 누군가 자녀를 1년 7만 불짜리 사립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내와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국에서 접하는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동질성에 기반했다. 회사에서 만나는 비슷한 나이대의 동료, 대학 동창 간에는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벌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이들은 적당한 중산층 가정으로서의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했고, 조금 무리하면 외제차 끌고 다니는 정도가 사치였다. 하지만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만나게 되는 한국인들의 경제력 상방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 나보다 더 좋은 빅테크, 더 높은 직급, 더 많은 주식을 가진 이들,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열등감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있고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한 누군가와의 비교는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의 장점을 바라보고,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라는 말은 실행 불가능한 조언이다.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열등감을 땔감 삼아 더욱 자기 계발에 매진할 수도, 애써 긍정적으로 자신을 몰아갈 수도 있지만, 이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신기루를 좇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열등감을 느끼는 당사자들조차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니까.
나는 열등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너는 네가 남들보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고, 너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지만, 여전히 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거야. 네 마음 알아.' 그리고 아내와 난 '인생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바라보기로 했다. 이 세상 속에 발을 딛고 살고 있기에, 절대 자본주의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우리 삶의 우선 순위상 제일 윗자리에 놓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할 날이 가까워져 삶을 정리할 때, 아등바등하며 살아낸 결과가 결국 집의 평수를 늘리고 더 좋은 차를 갖는 것에 불과했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아이에게 물려줄 것은 내가 일평생 모아 온 자산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바른 생각과 믿음이라고, 그렇게 아내와 나는 마음을 모았다.
열등감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야 할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가 되어 추구하는 가치로부터 나를 독립시킬 때, 조금씩 가능해진다. 커리어, 성공, 돈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없지만, 목적이 아니라 내 인생을 완성시키는 과정으로만 남겨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나만의 가치'를 찾아 집중할 때 비로소 나는 자유해질 것이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