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성 '다시 일어나는 사람'의 양분
2022년 1월 2일, 오울루 대학교 석사 과정 첫 학기를 마친 겨울 연휴에 읽고 적어둔 메모.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187쪽
삶의 불확실성과 모순들을 인생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행이나 아픔, 슬픔, 후회, 실망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려운 시기를 더 잘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특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190쪽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행동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과 시각의 변화를 통해 상황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지프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 사건을 딛고 일어설 것인지,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살고 싶다는 농담, 253쪽
불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얻게 되든 그것은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55쪽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마음이 아플 땐 불교 심리학, 365쪽
괴로움은 순전히 집착과 거부 때문에 일어난다. 괴로움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삶과 함께 흐르지 않으려는 신호다. 모든 삶에 아픔이 없을 수 없지만 현명한 삶은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다. 현명한 이는 불가피한 일에 나긋나긋하다. 따라서 괴로움을 겪지 않는다. 그들 역시 아픔을 알지만 아픔은 그들을 파괴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모든 것이 자기 길을 가도록 놓아둘 것이다. -니사르가닷타
괴로움은 줄을 빨리 타고 내려왔을 때 손을 데는 것과 같다. 손을 데지 않으려면 줄을 가볍게 붙잡아야 한다. 주변 사람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다. 자신의 몸과 느낌을 통제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179쪽
우리가 매일매일 세상과 주고받는 신뢰의 정도는 크고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어서,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에 견주면 몇 안 되는 목판으로 하늘을 떠받치고자 하는 유치한 시도와 비슷하다. (...) 그리하여 많은 경우 우리의 안녕은 천부적인 통제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신뢰를 일깨우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182쪽
삶은 완전히 통제하고 조절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은 늘 우리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186쪽
삶의 예측 불가능성은 바라던 미래가 도래하는 것이 정말로 있을 법하지 않아 보일 때조차도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품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마음이 아플 땐 불교 심리학, 367쪽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내려놓는 작업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마음이 아플 땐 불교 심리학, 375쪽
붓다는 괴로움에 끝이 있다고 말했다. 고통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휘두르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마음이 아플 땐 불교 심리학, 378쪽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는 존재이기를 놓을 때 우리는 어디를 가든 자유롭게 축복을 지니고 다닌다. (덧: 내려놓는다는 건 괴로움을 당하는 존재로 남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내 마음의 평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는 것.)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84쪽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가는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는 니체가 말한 "본질적인 고통"을 경험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 그에 못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가? 우리는 그저 고통을 참아내고 있나? 아니면 고통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기는가? 니체는 마조히스트가 아니었다. 니체는 고통을 좋은 삶의 구성요소로, 배움의 수단으로 여겼다. "오로지 고통만이 지식으로 이어진다." 니체는 말했다.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부름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85쪽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는 1883년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나는 여기서 니체가 고통이 인생에서 맡는 역할을 가장 솔직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그 끔찍한 신체적 고통의 의미는 그 고통 덕분에 내 업적에 대한, 거짓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수준 낮은 평가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나에게 다시 나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지독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자기 극복 행위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87쪽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덧: 아래 문단의 '선택'과 연결.)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88쪽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전과 똑같은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덧: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저 글자들이 종이를 떠나 가히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게 지난 3년을 들여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삶이 나에게.
삶으로의 사의를 담아,
2025년 7월, 임시저장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