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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ul 20. 2021

선운사에서

2021년 2월 26일, 전북 정읍으로 떠났다. 용산역에서 출발해 KTX로 2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곳. 이날의 최종 목적지는 정읍을 거쳐, 전남 고창의 선운사였다. 1박 일정으로 템플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동행은 대학교 같은 과의 한 학번 후배이자 친한 동생이었다. 작년 하반기 아이엘츠 준비 때 영어 공부와 관련해서는 물론, 핀란드 대학원 지원 때 작성한 motivation letter의 영문 오류 검수에 있어서도 이 친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대학원 지원 일정이 얼추 마무리되는 2월에 같이 조용한 템플스테이를 가서 쉬고 오기로 했다.


정읍과 고창을 거치며 마주한 몇 가지 순간들과 그 순간들이 데려온 감정들에 대해.


꽈배기 1개 500원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도착한 정읍역. KTX가 오가는 역이지만 주변은 '읍내'의 모습에 더 가깝다. '벌써' 하얗고 작은 매화가 핀 것을 보았다. 길가 공터 옆에 한 그루가 딱 있었다. 2월의 끝, 정월대보름 하루 전이었다. "봄이네!"

봄은 봄이 왔음을 실감하는 사람에게서 시작한다.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근처에는 '무림 강호'와 같은 맛집들이 많다. 우리가 향한 곳은 '양자강'이었다. 일반적인 국물식 짬뽕은 물론 비빔짬뽕이 유명한 곳이다. 2018년 12월에 혼자 선운사 템플스테이를 갈 때도 이곳에 먼저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내게 좋았던 곳을 다른 좋은 사람과 다시 갈 때의 기분이 참 좋지.


정읍에서 고창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읍역 근처의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 우리를 사로잡은 건 1개 500원인 꽈배기였다. 작은 가게에서 팔고 있었다. 여러 번 꼬지 않고 오히려 무심하게 한 번만 쓱 꼬았다. 친구는 설탕을 듬뿍 뿌려서, 난 설탕 없이 하나씩 먹었다.


고인돌대로, 고인돌장례식장


고창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선운사로 가는 버스를 한번 더 타기 위해 기다렸다. 목적 없이 밖을 어슬렁거려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날이었다. "날씨 좋다", "딱 좋다", "여유롭다"는 말을 마음껏 주고받았다. 내가 느낀 '좋음'을 거리끼지 않고 표현해도 괜찮은 관계와 순간들이 있다.


편의점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도 한 잔씩 먹고 선운사행 버스에 올랐다. 승객의 절반 이상이 중노년층이었고 10대 학생들도 보였다. 창밖으로 초록의 비중이 더 높아가고 있었다. '고인돌 장례식장'도 보였다. 고창은 고인돌 유적으로 유명한 곳. 친구가 어릴 때 가족들과 고인돌을 보러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고인돌 장례식장뿐만 아니라 고인돌대로라는 도로표지판도 눈길을 끌었다. 그쯤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고 할아버지가 접힌 유모차와 함께 뒷문으로 하차했다. 버스 기사는 문을 닫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던 할머니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반절하듯 굽은 할머니는 뒷문 계단의 바닥을 두 손으로 짚으며 내려갔다. 기어가듯, 아주 조금씩. 할아버지는 버스 밖에서 할머니를 잡아주기도 했다. 할머니의 시간은 멈춘 듯 흐르고 있었고 승객들의 시간은 흐르는 듯 멈추어 있었다. 승객들은 조심히, 할머니에게 시선을 두었다.


우리 앞에 앉아 있던 50대쯤 되었을 중년 여성이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할머니에게로 가 부축하려는 것 같았다. 그 참에 할머니는 모든 계단을 지나 땅에 한 발을 디뎠다. 나머지 한 발도 땅에 닿았을 때 할아버지는 유모차를 폈다. 버스 문이 닫혔다. 승객들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참고로 고창에는 '복분자로'라는 길 이름도 있다.


꽃무릇 사이를 걸어서
선운사 가는 길. 말없이 자박자박 걷기. 마음도 몸도 결마다 포근한 날이었다. 참고로 두 번째 사진은 녹차밭이다.

고창 선운사로 가기 위해서는 입구를 한번 지나야 한다. 템플스테이를 하러 왔다고 하면 확인 후 입장료 없이 들여보내 준다. 입구에서 선운사까지 가는, 느린 걸음으로 20여 분 되는 그 길이 처음에도 그랬고 이때도 그랬다. 좋았다. 나무로 된 데크 길을 자박자박 걸으면 내 옆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이따금 박자를 맞춘다.

가을에 꽃이 핀다고 한다. 꽃무릇.

길쭉한 나무들 사이로 잔디처럼 생긴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이건 선운사가 자랑하는 '꽃무릇'이다. 친구에게 내가 "잔디 같은데 잔디보다 되게 크네. 신기하다"라고 한 것. 그 이름이 꽃무릇인 걸 알게 된 건 이날 저녁 공양 전이었다. 보살님이 알려줬다.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세계가 열리고는 했다. 그 세계에서 나는 걸음마다 멈추게 된다.


꽃무릇만큼이나 선운사 주위로는 동백도 많다고 했다. 여느 동백나무보다 키가 컸다. "동백 같은데 나무가 되게 커서 아닌 것 같기도 해."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방의 창, 그 바로 앞에 꽃 핀 나무를 보면서. 보살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동백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날 저녁 공양 전 만난 고고한 황새. 둘이서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맛있는 채식 밥상


절에서는 채식을 하게 된다. 완벽한 채식을. 맛이 없다는 생각은 할 틈도 없었다. 모든 찬과 밥, 국이 입맛에 맞았다. 후식으로 나오는 과일도 물론. 다음날 점심까지도 절 밥으로 해결하고 나오는 길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2년 전에 왔을 때도 내가 이렇게 '행복한' 식사를 했었나?


올해는 육식의 비중을 많이 줄였다. 아직은 채식을 한다기보다 탈육식을 한다는 설명이 조금 더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간간이 먹지만 '이 정도로 줄인 것만 해도 어디야'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잘해보고 싶다. 그리고 더 '맛있는' 채식을 먹고 싶다.


절에서 먹은 그 끼니들만큼 맛있는 채식 밥상을 꽤 수고로운 요리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집 앞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면 나의 밥상이 지금과는 또 다를까 어떨까, 생각했다. '간간이'조차도 먹지 않는 날까지, 내가 선택한 음식과 그걸 먹는 내 행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름에 뜨는 그 달


작년 이후의 선운사 템플스테이는 그 전과 다르다. 스님과의 차담 등 대면 프로그램은 공양(식사)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두 중단됐다. 우리도 오후 5시에 밥을 먹고 나니, 씻고 방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심심하고 별로였다는 뜻이 아니라 외려 만족스러웠다는 뜻이다.


오전 5시쯤 나 먼저 눈을 떠서 일기를 쓰고 밖을 나섰다. 선운사는 템플스테이를 위해 머무르는 공간과 공양을 하는 곳이 도보로 10여 분 떨어져 있다. 보살님과 약속한 시간에 방 앞에서 기다리면 보살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조금 일찍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공양하는 곳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공간에서 불상을 앞에 두고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기 위해서였고 108배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지난 1월 하늘나라로 가셨다. 3월 초가 49재였으니 그 전쯤 이렇게 절을 올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에 가부좌를 텄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108배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할 텐데', '공양하러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공양에 합류해야 하는데', '할머니는 거기서 어떻게 지내실까' 등.

밝다. 밝히다.

이날은 정월대보름이었다. 108배를 하러 혼자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길을 걸을 때 품에 안으면 안은 채로 기우뚱할 것 같은 훤한 달을 봤다. '보름달'은 달이 뜨는 시기를 이름에 담은 것인데 시기가 아닌 달이 주는 감각으로 이름 지으면 무엇이 될까 생각했다. 환한달, 쟁반달, 하얀달, 포옹달 같은 것은 어떨까.

둘째날 아침 공양 후. 2021년은 겨울 아침의 매력을 안 해이기도 하다.
도솔암 오르기


어제와 다름없이 맛있게 공양을 하고 친구와 도솔암으로 향했다. 선운사에 오면 함께 들르는 곳 중 하나가 선운사에서 1시간 30분가량을 등산하면 만나는 도솔암이다. 내를 왼쪽 또는 오른쪽에 끼고 찬찬히 평지를 걷다가 오르막을 쭉 타는 길이다. 우리는 길을 한번 다르게 들어 예정 시간보다 더 걸었다.

햇살이 아낌없이 빛나서.
선운사 소원지 중 하나. 내 마음 네 마음..ㅋㅋㅋ

도솔암 가는 길은 도란도란 즐거웠다. 한국의 산에 가면 으레 한번은 보는 돌탑(?)에 우리도 돌 하나 얹으며 빌었다. "주 3일만 일하게 해 주세요!!" 도솔암에서는 친구가 가져온 폴라로이드를 찍었는데 사진을 찍을 때 소리를 녹음하면 사진에 QR코드가 찍힌 채 출력되고 그 QR로 '그날의 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서울로 가는 KTX에서. 절복 입고 도솔암!

직장 동료들에게 템플스테이 간다며 몇 주 전부터 자랑했다는 친구, 빠듯한 일정으로 많은 것을 소화하고 심지어 템플스테이 직전 2주 자가격리까지 하느라 더욱 친구와의 짧은 여행을 기대했던 나. 깔깔거리며 웃고 말없이 한참을 같이 걷고, 그 시간들이 지금도 소중하다.

정읍역 근처 카페 '치치하하'. 기차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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