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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부각 Jul 05. 2021

인생이 재미 없을 땐 정동길

이제 재밌는 건 산책 밖에 없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 마음이 복잡할 때가 있다. 사는 게 다 그저 그렇게 느껴지고 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는 것만 같다. 그럴 땐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인생 노잼 시기’가 온 것이다.


보통은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요즘은 쉽지 않다. 역시 산책밖에 없다. 인생이 재미없을 땐 정동길을 걷는다.


덕수궁 정문에서 신문로까지 이어지는 1km. 정동길은 근대 골목이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붉은 벽돌의 근대식 건축물인 이화여고와 정동제일교회 뒤로 높고 반짝이는 언론사와 관공서 건물이 보인다.


조선 시대와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덕수궁에서 시작한 길은 경향신문사에서 끝나지만, 곧바로 서울역사박물관이 보인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단박에 훑어보는 산책로인 셈이다.



도시가 하나의 생물이라고 했을 때 이 길은 500년에 걸쳐 쓴 일기장에 가까웠다. 먼 과거부터 바로 어제의 일까지 생생하게 남겨진 기록이었다.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록할지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순 없으니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더 중요해지고, 덜 중요한 것은 덜 중요해지겠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기만의 기록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겪게 됩니다.

- 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중에서

 

작가의 말처럼 기록은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 재밌었는지 슬펐는지 기분이 나빴는지 좋았는지. 곱씹다 보면 생각한 것보다 하루가 다채롭게 느껴진다.


사실은 무수히 많은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로 이뤄진 하루를 덩어리째 뭉뚱그려 구석으로 던져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이 재미없는 게 아니라 기록하지 않으니 발견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산책을 마치고 교보문고에 들러 작은 노트를 한 권 샀다. 이 노트에 나만의 정동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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