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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badger Apr 12. 2022

취향 찾기에 방해가 되는 것 1

단점의 진정한 단점

종종 나에게 자신의 얼굴을 그려 달라며 태연하게 부탁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고 마는데, 그려주기 싫어서인 이유도 있었지만 잘 그리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미대를 나왔으니 캐리커처쯤이야 몇 분 안에 뚝딱 그려낼 법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다시 그림을 제대로 그려야겠다는 다짐이 서자,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사람을 잘 그려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나는 내 스타일을 찾기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인체 드로잉 연습 또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각오를 다진 상태에서 인체 드로잉을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에 들었는데, 역시 내가 제일 사람을 못 그리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다들 서로의 그림을 칭찬했지만 내 크로키에는 별로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들은 자신 있게 잘 그리는데 사람 그림이 내 실력의 평균을 하향시키는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스터디원들에게 나도 잘 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다른 그림을 연습하는 것보다 인체 드로잉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일러스트 학원에서 따로 그림 스타일을 찾기 위해 그리고 있던 그림에 사람을 그려야 할 때면, 사람만 열 번을 넘게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사람을 너무 잘 그리려고 하지 마세요!!!”


인체 그림에 집착하는 나를 보던 선생님이 문장 끝에 느낌표가 몇 개 더 들어간 것 같은 말투로 조언했다. 그런 선생님의 요구가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잠시 그림 그리던 것을 멈추고 선생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그리는 일은 지금까지 나에게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잘 그리려고만 했는데, 구태여 노력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말에 조금은 황당했다.


“잘 그리는 걸 더 잘 그리면 되지, 못 그리는 거에 집착하지 마세요. 정 사람을 그려야 되면 아주 작게 그려봐요. 지금 다른 것도 못 하고 있잖아.”





단점을 대면하는 색다른 방식

사람을 아주 작게 그리는 것은 이전까지는 그 어떤 선택지에도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잘 그리는 것을 더 잘 그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내가 찾은 길이라고는 사람을 잘 그려서 전체적인 그림 실력의 평균점을 올리는 것뿐이었고, 그 결과 내 그림은 전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이 모두 옳았다.


결국, 그날 스케치에서 사람 그리는 일은 사람 크기를 확 줄여 아주 작은 사람들이 들어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러자 스케치는 금방 마무리되었고, 그림에 어울리는 색을 고르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가 그림에서 사람들이 작아지니, 색감이나 구도 같은 것들이 눈에 먼저 들어와서 그림이 더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 


귀갓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내 그림에 사람을 어중간한 크기로 그렸다 지웠다 한 일이 떠올랐다. 단점을 보강하면 그림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단점을 극복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데까지 생각이미쳤다. 그러자 일러스트레이터를 준비하는 기간은 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 상황에선 사람을 작게 그리고 내가 자신 있어 하는 분위기와 색감을 만들어내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써 사람을 그리는 것에 겁을 내고 자신 없어 하는 것이 단점이라는 점은 틀리지 않지만, 사람을 그리는 것이 완숙해지지 않은 이상 내 그림 안에서는 사람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내 안에 단점을 품고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

“참 쉽죠?”라는 명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밥 로스 아저씨는 풍경화 외에 다른 그림은 잘 못 그린다는 이유로 인물화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밥 로스 아저씨야말로 잘하는 것을 더 잘해서 한 분야의 대가가 된 사람이었다. 굳이 예술 쪽이 아니어도 잘하는 분야를 더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사람 그림’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을 한바탕 휩쓸고 나자, 내 삶에 ‘사람 그림’ 같은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수학 성적이 그랬고, 사회에 나오고서는 살이 잘 붙는 몸이 그랬다. 내성적인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어찌 보면 그렇게 큰 단점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지만, 집착으로 인해 어중간한 크기로 커져 있었던 것들이었다.


어색한 것을 고치는 데에 집착하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마저 놓치고 있었을 과거의 많은 날이 조금은 아깝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내 삶에 더 아름다운 색감과 더 아름다운 구도를 찾아내는 일이 늦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단점으로 생각하고 메꾸려고 했던 수많은 노력을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욱 가꾸는 데에 쏟았다면 내 삶의 구도나 색감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단점을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아주 작게 만들어서 전체를 바라보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한한 시간에 잘하는 것을 더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전략이야말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더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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