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여행을 생각해보면 늘 가물가물하다. 나는 원래 기록에 잼병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록들이 나에게서 도망도 잘 간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더 좋아질리는 없으니 이번 여행에서는 지난날의 나와 다르게 기록을 잘 남겨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1년이나 여행을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글을 써서 책을 내라며 헛바람을 자꾸 넣었다. 딱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런 기대는 전혀 안 하지만 그래도 블로그 정도에는 공유할 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드는 의문은 과연 여행기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재밌게 읽은 여행에 관련된 책은 고등학생 때 읽은 ‘80일간의 세계일주’(물론 이건 소설이다), 몇 년 전에 읽은 ‘여행의 기술’, 그리고 올 초에 읽은 ‘빼빼 가족 버스 타고 세계일주’ 뿐이다. 다른 책들은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자랑 일색이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였나, 서점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다가 엄정화가 쓴 무슨 여행책을 우연히 봤는데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온통 여백이 가득한 페이지에 조금 있는 글이라고는 ‘나는 걸었다. 슬펐다. 울었다.’와 같은 내용들 뿐이었다. 이런 글로도 책을 낸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고 정말 종이가 아까웠다. 물론 다른 책들은 이 정도까지는 아닐 거고 쏟아지는 여행책들 중에 정말 잘 쓴 책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행책이 재밌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여행을 가면 신기한 게 너무 많다는 것 이해한다. 나만 해도 하루에 벌어지는 새로운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그 새로운 일들을 다 적으면 내가 그것을 경험하면서 재밌었던 만큼 읽는 사람도 재밌을까? 오히려 나는 그게 대부분의 여행기가 재미없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글이 재밌는 것은 생각이나 관점이 새로울 때 재밌는 것이지 글 속의 경험이 새로울 때 재밌는 게 아니다. 그러나 여행은 일상생활에 비해 새로운 경험의 빈도 수가 너무 높아서 경험이 생각을 압도한다. 경험을 받아들이고 곱씹고 마음을 살피고 새로운 관점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시공간적 여유가 너무 적어서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오히려 더 적다.
그리고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지나간 일들, 주변 사람들, 나 자신의 장단점, 꿈 등등이 아주 구구절절하게 떠오른다. 이걸 잘 정리하면 나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나 자신과 괜히 씨름하기보다는 잘 화해하며 지낼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는 성장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과정이 타인의 공감을 얻고 보편적으로 유익한 글이 될 가능성은 낮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하나? 음악에 감동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좋은 음악을 만들 수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글들은 어떤 글일까? 그런 글들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이라는 경험은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계속 시도해가면서 나름의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뭐든 너무 어려워 말고 변화를 시도해봐야겠다. 억지로 꾸며내거나 어색하게 하지 말고 짧고 투박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