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 테를지, 몽골
2018. 8. 15. 화
국제봉사단원으로 울란바토르에 와서 일하고 있는 기철과 영하 덕분에 그냥 여행자로 와서는 알 수 없는 몽골을 알게 되고 만날 수 없는 귀한 몽골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날은 아동복지기관인 GNS(Good Neighbor’s Society)에 기철과 함께 방문했다. 처음 들었을 때 한국의 굿네이버스를 떠올렸지만 이와는 상관이 없고 WEC선교회라는 기독교 기관에서 세운 아동복지시설이라고 한다. 몽골의 아동복지시설은 어떤 곳일까?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하다 보니 점점 창 밖의 풍경이 달라진다.
울란바토르는 몽골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인 160만 명 정도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이다. 문제는 애초에 그보다 훨씬 적은 인구를 예상하고 계획한 도시라서 주택, 전기, 수도 등 여러 가지 인프라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란바토르의 외곽에는 아직도 게르촌이 많다. 게르는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전통 가옥이다.(다른 지역에서는 유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래 부분은 원통 모양이고 지붕은 원뿔 모양으로 작은 서커스 극장처럼 생겼다.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양모로 만든 펠트천 등을 씌워서 외부 공기를 차단하는 것이 구조의 전부다. 크기는 약간 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3~5평 정도 되는 것 같다. 저렴하고 분리, 이동, 설치가 편리하며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에 최적의 형태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울란바토르 외곽의 게르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의 있는 한옥마을들처럼 몽골의 전통이 이어져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런 것이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게르촌에 있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자기가 시골에서 살던 게르를 그대로 들고 와서 도시 근처에다 펼쳐 놓고 사는 경우가 많다. 전기, 수도 등이 공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게르는 사실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의 내부에는 서로 다른 공간을 구분하는 내벽이 하나도 없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생활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좋은 모습, 좋지 않은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볼 수밖에 없다. 옛날에야 동서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교육이 없었다지만 지구의 다른 한 구석에서는 아이에게 사용하는 말 한마디 까지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몽골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부모들이 주로 맞벌이를 하고 자녀양육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아 많은 아이들이 집에 그냥 방치된다고 한다. 학교 시설도 부족해서 2부제, 3부제로 다녀야 하니 학교에서 돌봄과 교육을 충분히 받기도 어렵다.
GNS도 역시 상대적으로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GNS는 이 지역에서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성장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로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삐걱 거리는 파란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멘트로 지은 조그만 건물 두 개와 게르 하나가 울타리 안에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한 여자분이 환한 얼굴로 반겨주는데 이 분이 이 기관 직원 중에 하나인 잠박 박시였다. 몽골에서 박시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조금 있으니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우리가 잠박 박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공간은 사무실이자 동네 도서관과 같은 곳이었는데 아이들이 책장에서 책을 꺼내와서 책상에 앉아 얌전히 앉아서 보고 다시 제 자리에 꽂아 놓고 다른 책을 본다. 이 동네에 이런 공간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몽골어로 된 동화책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자국어로 된 책의 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딱히 콘텐츠는 없다. 부모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그냥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 주는 수준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학교 숙제를 도와주는 정도이다. 그래서 기철이 이 기관과 함께 청소년 놀이문화를 개발하려는 것이고 상반기에 시범으로 운영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청소년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놀이 모임을 가지고 장기적으로는 이 청소년들을 더 어린아이들을 돌볼 수도 있는 리더로 성장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사실 오늘 이 기관에 온 것은 이 청소년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온 것인데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잠박 박시와 이야기도 하고 방문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린아이들과 공놀이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놀았다. 청소년들은 결국 오지 않았다. 몽골인들과 일을 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는 하는데 정말 이렇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이 몽골의 문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2018. 8. 16. 수
몽골에 있는 동안의 유일하게 관광다운 일정이다. 테를지 국립공원에 가기 위해서는 기사를 포함한 렌트를 해야 하는데 혼자서 갈 수는 없는 노릇. 나를 위해 기철과 영하, 기철의 9살배기 아들 요한이가 동행해주었다.
몽골의 초원과 하늘의 조합은 기가 막히다. 몽골 땅 전체가 고도가 높아서 우리나라로 치자면 소백산 중턱 정도에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하늘이 가깝다. 구름도 크고 아름답다. 나무가 거의 없는 낮고 완만한 산들의 허리춤에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게 몽골의 대표적인 여름 풍경이다.
몽골에 원래부터 나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점령하던 시절 나무를 싹 베어갔다고 한다. 그 뒤 조림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지도 못하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된 턱에 몽골의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이 되었다. 오히려 그린아시아와 같은 국제단체들이 몽골에 나무를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테를지에 가는 길에서 그린아시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을 보았다. 민둥산도 나름대로 귀엽고 아름답지만 사막화를 막기 위해 아름답고 울창한 숲이 잘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테를지에 도착하여 거북 바위에도 오르고 말도 한 시간 정도 타고난 뒤 강가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숲과 강이 어우러진 경치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비가 와서 강물이 많이 불고 물살도 거셌다. 얕은 곳에서 발만 잠깐 담갔는데 물이 너무 차서 발이 얼어버리는 줄 알았다. 물놀이할 거라면서 기세 등등하게 수영복을 갈아입었던 요한이도 발을 담가보더니 수영하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몽골엔 원래 비가 거의 오지 않는데 올 7월에는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이것도 거대한 기후변화의 한 흐름일까?
장작들이 모두 비에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어이 모닥불도 피워냈다. 아들의 소망을 들어주고 싶은 아버지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굴러다니는 통나무 하나를 가지고도 그 위에 올라가 혼자 버티기, 둘이 버티기, 셋이 버티기를 하며 놀력을 발휘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디 많은 곳을 구경 가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알루미늄 같은 번쩍거리는 재질로 만든 칭기즈칸 동상을 구경하러 갔다. 몽골 말로는 천진벌덕이라고 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을 정복하러 온 칸의 군대가 정말 무시무시했던 기억이 난다.(근데 그 나라가 몽골 맞나?;) 그 당시 원나라 주변국들은 정말 칸의 위력에 벌벌 떨었을 것이다. 천진벌덕에 가면 이런 역사적인 내용들을 조금 더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몽골은 자국어로 기록한 역사책이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문자로 기록된 역사책은 페르시아어로 쓰여 있고 이를 다시 몽골어로 번역해서 역사책으로 쓴다고 했다. 아, 정말 내가 다 속이 상했다. 천하를 호령했던 기마의 민족, 신분의 귀천을 없앤 민주주의 실천하려고 했던 칸의 정신들이 다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이를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역사책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한국에 있을 때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 잘못된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지나치게 멋지게만 포장하려는 시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성을 더 강조했으면 했다. 그런데 몽골에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 안에 깃들은 자랑스러운 일들에 이미 내가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민족의 뿌리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이는 타인과 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몽골의 청년과 어린이들이 자신의 민족에 대해 잘 알고 충분히 자랑스러워하고 그 마음을 바탕으로 몽골의 미래를 멋지게 만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다시 울란바토르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영하와 둘이 밤거리를 산책했다. 영하가 내 배낭의 옆 주머니에 끼워 놓은 선글라스를 보고 가방 안에 제대로 넣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가 위험하겠나 싶었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면 걷는데 뒤에 몽골 젊은이들이 너무 바짝 다가와 걷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힐끗힐끗 뒤를 보면서 걸으면서도 내가 예민한 거겠지 싶었다. 그런데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영하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뒤 따라오던 몽골 청년이 영하 가방의 지퍼에 손을 대고 있다가 웁스라고 작게 외치며 화들짝 손을 떼는 장면을 목격했다. 갑자기 너무 당황해서 피가 머리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청년 3~4명이 주변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제야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고 그 친구들을 계속 주시하다가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넜다. 계속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던 그 친구들은 길을 건너지 않았다. 정말 겉모습은 멀쩡한 친구들이었다. 옷도 잘 입고 얼굴도 건강해 보였었다. 여행자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을 심각한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더 참담했다.
몽골 자체에 발달한 산업이 없어서 대학을 나와도 할 일이 없다고 한다. 되지도 않는 짱구를 굴려본다. 이제 유목민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해 온 목축업을 기반으로 무언가 산업을 일으켜 보면 안 될까? 손재주가 좋다는데 수공예 업을 키워보면 안 될까? 그렇다고 정부에서 몇몇 기업을 지나치게 밀어주다가 우리나라처럼 대기업 중심 산업기반이 되면 안 될 텐데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내가 왜 남의 나라 일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나 싶었다. 우리랑 닮아서 그런가, 친구들이 와서 돕고자 하는 나라라서 그런가, 몽골에 와서 만난 아이들 표정이 너무 맑고 예뻐서 그런가.
경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직접 와서 이들의 어려움을 보고 들으니 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이런 궁금증을 계속 파다가 참지 못하고 더 큰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대학'이라는 곳을 갔으면 참 흡수력 있게 공부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 직접 몽골인들과 소통한 것이 아니라 기철을 통해 전해 들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와서 정리하려고 보니 빈 구석도 많고 자칫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누구라도 댓글로 남겨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