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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스트라이터 Dec 02. 2021

나는 유령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의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

나는 유령작가,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다.


뭔가 좀 있어 보일까 싶어 이렇게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남의 글을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다. 가끔은 윤문작가가 되기도 한다. 대필(代筆)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책이 될 법한 원고의 형태로 대신 써 주는 것이고, 윤문(潤文)은 제법 분량이 되는 기본 원고를 받아 그를 책이 될 만한 원고로 다듬어 주는 것이다. 윤문작가는 기본 원고의 분량, 다듬어야 할 부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금액이 결정되는데, 나 같은 경우는 업계에서 제법 인정받는 축에 들기에 건당 5백만원에서 1천만원 정도를 받았다. 대필작가의 보수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인데, 적게는 윤문 할 때 수준으로 받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생각지도 못한 큰 돈을 받기도 한다.


병에 걸려 오늘내일 하던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어록집과 자서전을 꼭 펴내고 싶다고 해서 회사 홍보팀과 대필작가들 십여 명이 붙어 일주일 만에 500페이지짜리 책 두 권을 출간해 내고 인당 1억원씩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받아 보지 못했고, 2000년대 중반 총선을 앞두고 4선 출마 선언식을 하려던 모 국회의원이 갑자기(공천경쟁을 하던 경쟁자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출판 기념회를 겸한 출마 선언을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급하게 대필을 맡게 되었을 때 제법 목돈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출마 선언식을 하겠다고 지역 유권자들과 언론사 기자들에게 뿌려 놓은 날짜가 있었고, 그로부터 인쇄, 편집 및 디자인, 교정 등에 필요한 날짜를 역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내게 주어진 집필 기간은 5일, 정확히는 나흘 하고 반나절 정도였다. 보좌관이라는 사람이 ‘의원님께서 정리하신 책의 방향과 담았으면 하는 내용’이라며 보내준 자료는 A4지로 달랑 두 장이었다. 평상시에는 관심도 없었던 정당에 속한, 이름 정도 겨우 들어봤던 국회의원의 지나온 인생과 정치 역정, 삶의 원칙과 정치 철학, 그리고 그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 나흘 반나절만에 A4지 150매 분량의 글들을 만들어 내야 했다.


마침 금, 토, 일 3일간의 연휴여서, 다니던 회사에 연휴의 앞뒤로 휴가를 내 이틀을 더 붙여 5일의 작업시간을 확보했다. 이후로 방에 틀어박혀, 햇반에 소고기 볶음 고추장만 넣고 비빈 밥으로 열 한 끼인가 두 끼를 내리 때우며 글을 써 내려갔다. 결국, 약속했던 시간보다 반나절을 단축시킨 만 96시간만에 145매의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고, 이제까지 받았던 대필 대가보다 0단위까지는 아니고 앞자리가 다른 금액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번 돈을 모으기는커녕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다. 쓸 때는 정말로 원 없이 써봤다. 매년 두 세 차례씩 유럽 여행을 다녀왔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사야 직성이 풀렸다. 한때 모 방송인이 맛있는 우동을 먹기 위해 아침에 일본에 갔다가, 우동을 먹고 당일 저녁 비행기로 돌아왔다고 해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랬다. 일본에서 열린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기 위해 낮 비행기를 타고 가서 야간 경기를 보고 다음날 첫 비행기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재정 상태에 빨간 불이 들어와도 ‘괜찮아, 작업 몇 개 맡아서 얼른 쓰면 또 돈이 들어올 텐데 뭘…’이라며 별 생각 없이 돈을 써 왔다.


그러나, 대필 작업이라는 것이 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경쟁 역시 치열 해져 이 분야에도 덤핑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한 이들, 방송 작가로 활동하다 결혼, 출산 등의 이유로 일을 그만 뒀다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 둔 뒤 소일거리 삼아 다시 키보드 앞에 앉은 이들은 저렴한 비용으로도 대필 작업을 도맡아 가져 갔다. (물론, 그런 일들 중 상당 수가 ‘미완성 원고’인 채로 나에게 ‘윤문작업’의뢰로 들어오기도 했다.)


일거리는 줄어들었지만 씀씀이는 전혀 줄어들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름 업계(?)에서 이름난 고스트 라이터로 십 수년간 활동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거의 바닥이다시피 했다. 아니 이런저런 이유로 떠 안게 된 부채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심각한 마이너스 재정 상태였다.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린 것일까?’

‘어디서부터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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