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강남스타일이 유행하던 2012년
나 마드리드에서 삼일 동안 쓸돈 100유로 남았엌ㅋㅋㅋㅋ
"내 카드는 맛이 갔어 프랑스 은행에 전화해야 될 거 같아"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하냐 우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드리드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남은 돈을 챙겨보고는 황당함에 웃고 있었다.
마틴(정확한 발음은 마르-탱이라고, 함께 다니는 동안 녀석은 몇 번을 강조했다.ㅋㅋ) 카드는 뭐가 잘못됐는지 부르고스에서부터 먹통이 되어 프랑스의 은행에 직접 전화를 걸지 않으면 카드를 쓸 수가 없을 것 같단다.
묘하게도 같이 까미노 다니던 친구들 대부분이 중간지점인 부르고스에서 여기저기로 헤어지게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고, 산티아고를 향해 계속 가는 친구들도 있고, 마틴이랑 나처럼 다른 여행지로 떠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덕에 부르고스에서 이별파티한다고 술을 왕창 먹었고, 우리가 마드리드에 도착한 날은 그다음날이었다.
전날 술을 그렇게 먹고 아침부터 마드리드 간다고 부산을 떨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버스에서 선잠을 자며 마드리드에 도착.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두 시간 정도 마드리드를 돌아다니면서 호스텔이란 호스텔은 다 봤는데 생각보다 방값이 비쌌다.
둘 다 선뜻 결정을 못하면서 머뭇거리던 사이에 내가 그냥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하루만 지내자고 했다.
"마틴, 정 안되면 나 이비자 갈 돈이라도 당겨 쓰자. 그리고 내년에 유럽 다시 올 테니까 이자까지 쳐서 갚아"
"ㅋㅋㅋㅋㅋㅋ알았어, 파리로 와, 내가 너 재워주고 맥여주고 파리 구경도 시켜주고 할게"
그렇게 우린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스텔에 50유로나 주고 방 한 칸을 구했다.
마드리드 가용 예산의 50%가 홀랑 날아가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뭔가 돈 걱정이 크게 안됐다. 마드리드 도착 시점부터 아니 부르고스 도착 며칠 전부터 예상 지출보다 실제 지출이 이미 커져있어서였는지 이상하리만큼 남은 돈에 대한 걱정이 별로 안됐다.
이미 그때 부터 이비자를 반 쯤 포기했던거 같기도 하다.
"씻고 나가서 뭘 좀 먹자.. 잠깐, 나 전투식량 이거 하나 남았어. 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올ㅋㅋㅋㅋ오키 씻고 나가자"
대충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고 마드리드 광장으로 나섰다(마틴은 수도에 왔으니 카라 달린 옷을 입어야겠다며 굳이 셔츠를 꺼내 입었다).
돈이 없어서 카페에 가서 쿠키를 하나 사고 뜨거운 물을 얻어서 김 병장 전투식량을 불렸다.
"야 이거 진짜 우리 둘이 마드리드까지 와서 이게 뭐냐"
그렇게 마드리드 광장에서 남자 둘이 궁상을 떨면서 김 병장 전투식량을 나눠먹고 서로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며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아, 나 파리에 있을 때 교환학생 왔던 스페인 친구가 마드리드 사는데 연락해봐야겠어, 핸드폰 줘봐"
그렇게 마틴이 연락을 시작했고 30분 뒤, 우리의 마드리드 여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친구네 집 마드리드 역 바로 근처래. 지금 차 가지고 온다는데? 우리만 괜찮으면 자기 집에서 지내래, 빈방 많다고"
"ㅋㅋㅋ헐?(1)"
그렇게 우리는 마틴의 스페인 친구 파즈를 만나게 되었다.
파즈가 우릴 픽업해서 집에 가는 길에 하는 말
"마틴은 스페인어를 잘하는데 스티븐이 스페인어를 잘 못하니까 지금부터는 영어를 쓰자!"
이 얼마나 똑 부러지는 여성인가? 이런 똑부러짐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마드리드 출신 답게 축구를 매우 사랑했고, 요리를 해 친구들을 대접하는 것을 즐겼고 또 잘했으며, 다양한 시사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굉장히 매력적인 스페인 미녀였다.
"아 맞다. 오늘 마드리드 게임 있는 날인데 괜찮으면 집에 가기 전에 잠깐 펍에 가서 축구 보고 갈래?"
"ㅋㅋㅋ헐?(2) 나 레알 완전 팬이야, 오늘이 아마 엘 클라시코일 텐데?"
"맞아, 게다가 마드리드 홈이야 ㅋㅋ보고 들어가자 재밌을 거야"
그렇게 엘클까지 보고 파즈네 집에 도착했다.
근데 집이 좀 크다..?
"여기가 게스트룸인데 지금 비어있으니까 둘이 쓰면 될 거 같아. 옆방은 동생 방인데 거기도 쓰고 싶으면 그냥 써 며칠이나 있어야 돌아올 거야"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마틴이 거실에 걸려있는 소 뼈(?)를 보며 물었다.
"저 뼈는 다 뭐야?"
"아 아버지 취미가 사냥이야, 지금도 가족들이랑 아프리카에 가 계셔"
"ㅋㅋ헐?(3)"
파즈도 원래는 함께 가려고 했는데 휴가를 못 내서 못 갔다고 한다.
마틴도 파즈가 이 정도로 잘 사는지(?) 몰랐는지 눈이 휘둥그레..
'아 신께서 날 이비자에 보내주려고 하시는구나. 환락의 끝을 보고 오라 손짓하시는구나'
내 눈앞에는 곧 가게 될 이비자가 아른거렸다.
Mi Casa, Su Casa, Welcome to Madrid
"나는 이번 주 내내 일하러 가야 되는데, 나 없어도 그냥 편하게 지내. 마드리드에 온 것을 환영해!"
파즈가 집을 구경시켜주는데 옥상엔 수영장이 있단다. 50유로짜리 호스텔이 팬트하우스로 변하는 순간, 마틴 녀석도 분명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마드리드 온다고 미리 연락을 했으면 친구들을 모아 풀파티를 준비했을 거라는 얘기와 함께, 그라나다에 있는 별장으로 다 함께 여행을 같이 갈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내년 바캉스 시즌에 마드리드에 꼭 오라는 말을 더했다.
아- 스페인이여, 아- 마드리드여!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은 짧지만 강력했다.
파즈와 함께 몇 가지 스페인 요리를 함께 만들어 먹기도 했고, 내가 간단한 한국식 요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마틴이 꼭 가고 싶어 하던 박물관에도 다녀오고, 파즈 친구들과 함께 클럽으로 춤추러 다니고, 카메라만 메고 사람 한 명 없는 씨에스타 시간의 마드리드 거리를 홀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연스레 주제는 당시에 메가 히트를 치던 '강남스타일'이 되곤 했는데, 마틴은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댄서라며 바람을 잡았고 스페인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강남스타일을 가르쳐 달라며 농을 던졌다.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매번 몇 가지 춤 동작을 가르쳐줬는데 그게 그럴 듯했는지 대부분 금방 믿는 눈치였다. 그 덕에 스페인에서 강남스타일이 나올 때에는 항상 신나게 놀았다.
아직도 종종 마틴이랑 킥킥거리면서 얘기하는 이야깃거리다.
그렇게 마드리드에서 잊을 수 없는 며칠을 보내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환락의 섬 이비자로,
마틴은 파리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스페인 여행할 때 다닌 곳마다 이런저런 축제가 있었고 흥미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것 같다. 마드리드에서의 며칠은 조금 더 우연에 우연이 겹친 운 좋은 케이스였던거 같고.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는 수 많은 친구들과 함께 스페인 여행에서 겪은 추억들이 생생하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시시껄렁한 농담, 별명,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까지, 다녀온지 3년이 넘어가는 스페인 여행이 아직도 꿈 같이 여겨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