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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 Mer Jan 30. 2023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소년만화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점점 성장해서 문제를 극복해내는 이야기, 경쟁에서 열세에 있던 동료들이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뤄내는 언더독 서사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마니까요. 특히 그 중에서도 만화책을 전부 사서 모을 정도로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바로 슬램덩크입니다.


처음에는 농구를 좋아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몰랐던 풋내기 강백호가, 농구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서 한 명의 바스켓맨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소녀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충분했지요.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이미 소녀는 아니게 되어버린 저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러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강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인 북산의 선발선수들이 모두 엄청난 문제아라는 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다섯명은 그다지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슬램덩크의 원주인공인 강백호는 말할 것도 없는 문제아죠. 인상은 험악하고 머리는 빡빡 깎은 빨간머리, 말보다 손발이 먼저 나가고 실력도 없는 초짜 주제에 상대팀은 물론 팀메이트에게도 시비를 거는 게 일상이니까요. 정대만은 사이가 좋지 않은 걸 모자라 송태섭과 피터지게 싸운 사이고, 서태웅은 얌전해 보이지만 패스를 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플레이를 구사하고, 채치수 또한 전국제패를 부르짖으며 후배들에게 엄한 주장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문제아, 불량아, 양아치, 사회부적응자, 독불장군….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당장 눈을 내리깔고 숨죽여야할 것 같달까요. 이렇게 팀을 이루기도 참 쉽지 않을  거예요.


다만 단 하나,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농구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이겠죠.


이래서 극장판에서는 모범생 안경선배가 드러나지 않은 걸지도…


그래서 슬램덩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저는 <문제아들이 좋아하는 것에 열중해서, 문제들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만화와 달리 영화라서 이 사실이 더욱 잘 보입니다. 앞뒤 서사 없이, 경기만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직면해있는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니까요. 최강산왕이라는 상대팀 앞에서 송태섭은 돌파할 수 없는 이명헌이라는 도내 넘버원 가드에게, 채치수는 자신보다 모든 게 뛰어난 센터 신현철에게, 서태웅은 국내에서 가장 강한 에이스인 정우성에게, 정대만은 본인이 포기했던 과거의 시간에게 직면하고 맙니다. 다들 자신의 문제에 짓눌립니다. 과거가 발목을 붙잡고, 미래가 두려워 손이 떨립니다.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여기서 최강의 문제아 강백호가 등장합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마음만 가득한 풋내기 초짜가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힘’이란 강력합니다. 그 마음은 어찌나 강력한지, 놀랍게도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강백호는 북산의 문제아들에게 지금 당장 눈 앞의 문제, 이명헌과 신현철과 정우성이 아니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농구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지금 당장 여기, 내가 좋아하는 농구를 하는 이 순간에 집중하게 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힘은, 다른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지워버립니다. 강백호가 산왕에게 이긴다고 선포한 순간, 볼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그리고 부상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순간을 위해 ‘단호한 결의’를 내린 순간, 북산의 문제아들은 눈 앞에 농구공과 링밖에 보이지 않게 된 거지요.


내가 이명헌을, 신현철을, 정우성을 이길 수 있을까? 북산이 산왕에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생각들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북산의 문제아들이 생각을 지우고 발을 움직이는 그 순간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강백호입니다. 채치수는 전국제패를 잊고 팀과 함께 전력을 다 하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게 되고, 정대만은 농구를 포기했던 과거를 잊고 현재의 슛에 최선을 다하며, 서태웅은 정우성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팀의 승리를 위해 패스를 하고, 강백호 역시 자신이 멋져보이려는 슬램덩크를 포기하고 풋내기슛이라 무시했던 레이업슛을 던집니다.


난 천재니까!


영화의 포인트는 극장판의 주인공이 바로 강백호가 아니라 송태섭이라는 점입니다. 작은 키의 송태섭은 드리블을 잘 하고 농구센스가 좋지만, 어떻게 보면 강백호나 채치수처럼 피지컬이나 체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정대만이나 서태웅처럼 천재라 불리지도 않는, 평범한 편에 속하는 선수입니다. 만화에서도 크게 강조되는 캐릭터는 분명 아니었죠. 영화가 시작되고 초반, 원작자이자 감독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크로키로 가장 먼저 그려내는 송태섭은 고개를 숙인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걸어나오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죠. 마치 과거, 그리고 산왕의 존프레스라는 압박에 눌려있는 모습처럼요.


그는 농구를 좋아했었지만 형의 죽음과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 이제는 농구가 좋아서가 아니라 농구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에 가까운 상태로 등장합니다. 송태섭은 형이라는 과거에 발목을 붙잡힌 상태로, 넘버원 가드인 이명헌과 매치업을 해야하는 산왕전이라는 두려운 미래에 손을 떨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바로 영화의 주인공인 송태섭이 아닐까요. 학교에서의 괴롭힘, 맞지 않는 농구 팀메이트들, 자꾸만 엄마를 화나게 만드는 자신… 송태섭은 문제에 직면하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을 택해왔습니다.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숨기면, 문제를 보지 않고 숨긴 채 강한 척 할 수 있으니까요.


넘버원 가-드

하지만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송태섭은 형의 꿈이었던 산왕전에 임하면서 처음으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마주할 용기를 냅니다. 넘버원 가드라는 타이틀은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이거였지,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트리거이고 문제를 직면하게 하는 일종의 계기이니까요.


송태섭은 농구선수에게 있어 핸디캡일 수 있는 작은 키의 선수지만, 그 체구에서만 나올 수 있는 낮은 드리블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존 프레셔를 돌파해냅니다. 키가 큰 에이스 선수였던 형과의 비교를 떨치고, 최강의 가드인 이명헌과 정우성의 압박을 벗어나는 순간, 송태섭은 자신을 누르고 있던 모든 프레셔들을 부수어 버립니다. 이렇게 산왕전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떨쳐낸 송태섭은 산왕전의 마지막 순간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가, 이후 정면을 바라보고 돌격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드디어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농구,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듯이요.


뚫어, 송태섭!


천재가 아닌 송태섭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변명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두려움을 인정한 채 그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강백호의 명대사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난 지금입니다!‘가 와닿는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힘만이 이걸 가능하게 합니다. 북산의 문제아들은 최강산왕을 향해 불량한 태도와 눈빛으로 달려들어, 결국 그들을 돌파해버리고 맙니다. 농구를 좋아한다는 것에만 집중해서 앞으로 달려나가는 이 문제아들에게 반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산왕에게 이긴다! by 천재 강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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