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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Nov 14. 2024

좋은 이름, 나쁜 이름, 이상한 이름

[카페 네이밍 후후후기]  gml, 스탠다드시스템, 업스탠딩커피 ...



21년부터 23년까지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의 BX팀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브랜드의 공간을 만들거나, 공간 브랜드를 만드는 일. (둘을 딱 잘라 구분할 순 없지만, 같다고 할 수도 없어서 줄지어 적었다.)


작은 카페를 만들더라도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방향성이 천차만별이었지만, BX 업무의 시발점은 항상 ‘이름’이었다. 공간 디자인과 달리, BX는 전체 디자인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로고를 제작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름이 먼저 결정되어야 했다.




좋은 이름이 뭘까..


스쳐 지나가는 생각(힘들었던 순간들..)이 참 많다. 을의 입장에서 좋은 이름은 고객이 흔쾌히 오케이-하는 이름.. 이건 저렇고 저건 저렇다 태클 걸지 않고, 마음에 쏙! 들어요! 하는 이름..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때론 고맙게도 고객이 꼭! 쓰고 싶은 이름이 있다며 먼저 말해줄 때도 있다. 감사합니다. 이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별 뜻은 없어요. 문득 떠올랐는데 어감이 좋더라고요. 오, 그렇군요.. 별로예요? 그것은 아니지만.. 혹시, 저희도 아이디어를 모아보고 제안드려도 될까요? 일을 힘들게 만드는 오지랖. 하지만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선, 아무 단추나 냉큼 잠굴 순 없으니..


모든 브랜드가 그러하겠지만, 신생 (특히 규모가 크지 않은) 브랜드는 네이밍이 참 중요하다. 사람들은 브랜드를 이름으로 만나고, 이름으로 기억하고, 이름으로 이야기한다. 그리 중요한 이름을 그저 개인의 취향으로만 짓는 것은 안 될 일이다.


허나 현실은 브랜드 오너의 취향이 몹시 핵심이다.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다. 브랜드 운영 주체의 성격과 취향, 가치관은 브랜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심지어 동기화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니 브랜드 오너의 취향은 어쩌면 브랜드다움의 핵심일지도.

브랜드 네이밍은 그 자체로도 어렵지만, 제안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특히 어렵다. 특히 누구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결과물이라는 특징 때문에, 모든 개인이 각자의 경험과 성향을 바탕으로 어감만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쉽다. 따라서 클라이언트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이름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분명 어감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보다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름을 결정할 수 있게..


(근데 솔직히 그냥 ‘느낌’이 좋은 이름도 있죠..)




어제 gml(퇴사 전 나의 마지막 네이밍)에 다녀왔다. 평일 꽤 늦은 시간에 갔는데도 사람들이 많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이참에(?) 네이밍에 관한 나의 취향을 적어볼까 하는 마음에 쓰는 글.



- 본 글의 모든 내용은 작성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스튜디오의 공식 입장이나 해당 브랜드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T-FP의 포트폴리오이며, 저작권은 홍기웅 작가님께 있습니다. 양측의 허락을 받아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gml


퇴사 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프로젝트. 물론 네이밍과 슬로건만 짓고 퇴사했기 때문에 최종 결과물에 관해서는 기여한 바가 없는 프로젝트지만, 네이밍이 첫 번째 제안에서 바로 컨펌되고, 이어서 슬로건 역시도 단번에 오케이-되어서 기쁘고 보람찼던 기억.

©Kiwoong Hong

gml은 ‘g/ml’로 표기하여 제안했는데,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원두(g)와 커피(ml)를 파는 곳이라는 뜻. 앞으로 다양한 원두를 취급하겠다는 계획을 듣고, 그 방향성을 담고자 했다. 동시에 브루잉 레시피를 떠올리며 항상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이미지를 원두(g)/물(ml)의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당시 나의 추가 안은 ‘suip cong.’ 생각해 보니 모든 원두가 수입산이니까.. 수입콩.. 이건 제일 마지막에 제안했는데, 덕분에 다들 웃으며 분위기 좋게 미팅을 마쳤다. (다들 농담인 줄 알았다던데, 사실 난 진심이었..)


gml이 가장 좋다고 금방 컨펌을 받았지만, 이후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브랜드 방향성을 계속 논의하다 보니 고객은 모브랜드(의류 관련)의 강점을 활용하여 원두를 다양한 소재(fabric)로 소개하거나, 향후 라이프스타일 편집샵으로 확장하는 것도 염두하고 있어서 ‘g/ml’이 그런 방향성을 담을 수 있는 이름인지 고민된다는 것.


마음에 드는 이름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포기할 수 없다! 이름에 더 풍성한 의미를 담을 방법을 고민. 고민을 지우기 위한 방법 고민. gml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슬로건을 적었다. 짧고 쉽게! 구구절절하면 안 돼.. 일단 g는 good.. 소재.. 확장성.. 라이프스타일..

“good materials for life”


다행이다. 슬로건이 이름을 살렸다. 뜻밖의 위기로 인해 오히려 좋아진.. 참 마음에 드는 이름과 슬로건. 오랫동안 잘되면 좋겠다. 브랜드의 실체도 좋으니까, 앞으로도 잘 되겠지. (파이팅!)




스탠다드시스템


네이밍 과정에서 정말 많이 헤맸던 프로젝트. 일산 소재 모브랜드의 쇼룸에서 독립된 스페셜티 카페 브랜드로 방향성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모브랜드와의 연계성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깊었다. (내 머릿속엔 계속 1산과 2산만 맴돌..)

©Kiwoong Hong

다행히 팀에는 내 머리만 있는 게 아니었고, 대표님 그리고 팀원과 함께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낯설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스탠다드시스템. ‘커피’와 ‘카페’가 쉽게 연상되지 않는 것도 좋고 (스테인리스가 많이 사용된) 공간과도 잘 어울렸다. 게다가 이름의 의미를 풍성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기분.


‘스탠다드’와 ‘시스템’. 두 단어의 의미를 차근차근 쌓아봤다.


먼저 기준 혹은 표준이라는 뜻의 ‘스탠다드’. 모브랜드에서 로스팅하는 시그니처 블랜드 외에도 정말 좋은 품질의 스페셜티 커피와 마이크로랏 커피까지도 취급할 예정이라고 했으니, ‘스탠다드’에는 스페셜티 카페 브랜드로서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는 뜻을 담을 수 있겠다.


다음으로 체계 혹은 장치라는 뜻의 ‘시스템’. 오랜 업력의 모브랜드를 통해 근본적으로 아주 탄탄한 실력과 체계를 갖고 있으니, ‘시스템’은 높은 퀄리티의 제품/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모브랜드의 강점(로스팅 실력/경력, 생산 설비, 네트워크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Higher Standard by Solid System”

이름에 담긴 뜻을 구체화하고, 모브랜드와의 연계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길 바라며 슬로건을 적었다. 이야기하고 싶은 (좋은) 것이 가득한 프로젝트지만, 주제에 맞게 여기서 마무리..




업스탠딩커피


스탠다드시스템과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던 업스탠딩커피. 결론부터 말하자면, 업스탠딩커피는 고객이 지은 이름이다. 여러 차례 다양한 이름을 제안했지만, 어느 날 클라이언트가 '업스탠딩'이라는 단어가 본인의 태도와 생각을 잘 표현하는 단어인 것 같다고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Kiwoong Hong

제안 단계에서 즉각 탈락했지만, 나 혼자 몹시 좋아했던 아이디어는 '이머징마켓'. 신흥시장에 위치한 업스탠딩커피가 신흥시장을 대표하는 로컬브랜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재밌으니까!?) 제안했다. 당시 친하지 않았던 팀원이 나중에 친해진 뒤에 말해줬는데 (자꾸 이머징마켓이 좋다고 하는) 나를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이상한 사람은 맞지..)


시간이 지나면서 업스탠딩이라는 이름이 정말 브랜드에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커피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태도가 한껏 묻어나는 이름이다. 언제 가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반가운 곳. 하지만 초반에는 업스탠딩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도 하고,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태도’를 이름으로 만들었으니까, 그것을 더 강조하면 어떨까.. 사람들이 잘 아는 단어랑 같이 써서 조금 더 인상적으로 표현할 순 없을까.. 하는 마음에 슬로건을 만들었다. (and it rhymed..!)

“Upstanding Coffee understands coffee. Upstandingly.”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업스탠딩-스러움이 짙어지는 업스탠딩커피. 집 앞에 있으면 매일 갈 텐데.. (물리적 거리로 인하여 많이 못 갔지만) 근처 비슷-한 지역에만 가더라도 생각나는 그런 곳.




그란스


남양주. 스페인. 친구의 집. 세 가지 키워드로 시작한 그란스의 네이밍. (답이 정해져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름을 지었다..)

©Kiwoong Hong

‘남양주’는 카페가 위치한 지역. 남양주에서 시작하는 브랜드라는 점이 서울촌놈인 나에겐 매우 중요한 오리진으로 느껴졌다.


‘스페인’은 이곳에서 선보이는 독특한 원두. 클라이언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노마드 커피를 국내에 유통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따라서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독특함을 표현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친구의 집’은 공간의 (초기) 컨셉. 친구의 집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사람들이 오가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남양주.. 스페인.. 친구의 집.. 스페인 친구, 남양주.. 사람 이름 같은 단어를 만들면 ‘아무개의 집’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남양주를 영어로 적어보았다. N-A-M-Y-A-N-G-J-U. 이제 이걸로 이름을 만들어보자. 바르샤 선수들을 떠올리며.. 일단 후안(JUAN)..

“JUAN MAGNY”

후안 매그니. 없을 것 같지만, 있을 것 같은 스페인 이름 완성! (뿌듯) 그러나 이 이름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이름은 최종적으로 헤드 바리스타가 좋아하는 영화 제목을 딴 '그란스'가 되었다. 구글에 찾아보니 스웨덴어로 ‘경계’ 혹은 ‘한계’라는 뜻의 단어였다. (맞아요. 결국 운영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게 좋은 것 아니겠어요?)




공영


공영은 미련이 많이 남는 프로젝트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지만, 최고의 결과를 만들지 못한 듯한 아쉬움. 프로젝트의 끝은 브랜드의 시작이기 때문에, 어쩌면 에이전시의 필연적인 고달픔. 언젠가 어르신들께 들었던 쓰린 말씀들이 떠오른다. 좋은 광고는 광고주가 만드는 거야.

©Kiwoong Hong

청담에 위치한 공영은 ‘나 같이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이 갈 만한 곳이 없다’는 클라이언트의 말에서 출발했다. 화려하고 블링블링한 거리 한복판에 언제든지 편안하게 들러 쉴 수 있는 ‘처마의 그늘’ 같은 공간. 네이밍도 이러한 맥락으로 진행했다.


모두를 위한 그늘, 공영公影. 영어로는 shade of ours. 다른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인지라, 고객에게 제안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컨펌을 받았다. (^_^/)


프로젝트의 끝자락, 우리가 그렸던 공영의 목소리로 작은 인사말을 적으며 안녕을 고했다.

“문득 쉬이 들어와 편히 머물다 가세요.”





좋은 이름이 뭘까..


얼마 전 퇴근길에 지하철 한 편 “야옹아 멍멍해봐”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좋네. 강아지 이름이 야옹인가. 눈에 띄고, 쉽고, 기억에 잘 남고, 뭐 하는 곳인지도 잘 드러나고.


이름을 파는(?) 입장에서는 팔리는 이름이 좋다. 하지만 사라지면 싫다. 결국 좋은 이름은 살아남는 이름이다. 나만 아는 이름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리우는 이름으로 자라나는 이름.



갑자기 *후추가 보고 싶다.







*후추는 갓 태어나 1년간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처가에 사는 막내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네 마리 중에 막내인데, 덩치가 제일 크고 힘이 세서 서열은 제일 높은 것 같아요. 고양이들에겐 깡패인데, 인간에게는 아주 살가워요. 어느덧 후추가 10살이 됐네요. 후추는 생명체에게 제가 지은 첫 번째 이름이어서,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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