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다이빙 인사이트
주니어 기획자의 하이퍼 리얼리티한 사이드 프로젝트 체험기
그만 주저 앉을 것인가, 그럼에도 나아갈 것인가.
왕년의 영광에 머무를 것인가,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쓸 것인가.
– 다산의 마지막 수업 中
iOS 앱을 만들었다. 웹 기획만 해왔던 터라 앱 기획도 해보고 싶다는 니즈가 항상 있었는데, 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져서는 평생 실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팀원 모집부터 했다. 평소에 어떤 앱을 만들고 싶은지,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나름 정리를 해왔기 때문에 구인글은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고, 같이 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금세 모였다.
프로젝트 킥오프 2일 전, 협업툴에 팀원들의 계정을 공동 작업자로 추가하고, 전체 로드맵과 우리의 목표. 그리고 매주마다 어떤 과업이 완료되어야 하는지 마일스톤을 작성했다. 다음으로 애자일 프랙티스를 적용해 매주 스프린트 미팅과 회고를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 또 회의록은 어떤 식으로 작성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공유했다. 이 기회에 Notion, Asana, Productboard 같은 PMS(프로젝트 관리 도구)를 좀 더 능숙하게 써보고 싶기도 했고.
킥오프 날, 각자 인사와 함께 (헤비한) 스몰톡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프로젝트 목표와 로드맵을 설명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앱을 만들 것인지, 이 앱을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브리핑하고, 킥오프 중간마다 참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연신 건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땐 다 나갈지 몰랐지..) 기획자로서 경력이 길고 짧음을 떠나서, 팀을 리드해본 경험은 꽤 있었으니 여러분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려움이 없도록 잘 서포트하겠다고 말하며 킥오프를 마무리했다.
이번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사이드 프로젝트 경험이 많았던 직장 동료 개발자분에게 이번에 진행할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료 개발자분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개발자 :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아마 사람들이 엄청 들어오고 나갈 거예요. 상심할 시간도 없을테니까 바로 인원 충원해서 Keep going 하세요.
본인 : 음…조언 맞죠…?
아니 조언을 해달라 했더니 현실감 넘치는 경험담으로 프로젝트 시작 전부터 김새게 하다니.. 그런데 정말 그 일이 일어났다. 우리 프로젝트에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중도 이탈자가 정말 생긴 거다.
킥오프 후 2주일 정도 지나고, 개발자 한 분이 원하던 곳에 취업을 해서 더 이상 참여할 명분이 없다며 팀에서 나가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 멤버 그대로 앱 출시까지 함께 하자고 한 도원결의는 물 건너갔지만, 취업을 축하해주며 얼른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공고를 다시 올렸다.
첫 번째 이탈자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마음이 든든했다. 유명 N 포털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팀원에 있다는 것만으로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지가 되어서였을까. 필자도 UXUI에 관심이 많은데, 그 관심을 가끔 화면설계서에 녹여낼 때가 있다. 이번에도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너무 힘을 줬는지 실제 화면처럼 설계(Hi-fidelity Level)를 해버렸고, 그렇게 나는 디자이너의 Role을 침범해버렸다.
디자이너분이 회의에 자주 불참하고, Figma에 디자인 파일 업데이트도 여러 번 누락되자 답답한 마음에 디자이너분께 잠깐 연락이 가능한지 체크 후 꽤 긴 시간 통화를 했다. 현업에서 이미 대형 프로덕트를 핸들링하는 만큼, 바빠서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고충으로 말문을 열었지만, 사실은 이게 내 포트폴리오로 쓰일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고. 그래서 본인도 이번 그만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칼로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 들었다. 유능한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이탈해서 허망한 마음보다 그토록 ‘협동심’, ‘같이의 가치’를 강조했던 내가 같이 일하는 팀원의 할 일을 빼앗고, 창의성을 발현하지 못하게 했다는 자책감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며, 앞날을 응원한다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팀에서 내보냈다. 어쩌면 사람을 내보내는 것에는 이미 프로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N 포털 프로덕트 디자이너분이 이탈하고 나서 바로 개발자 한 분이 또 나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유능한 디자이너의 부재로 본인도 이 프로젝트가 과연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된다며 시간 낭비 같으니 그만 팀에서 나가겠다는거 였다. 이미 프로젝트의 Due Date도 다가오고 있고, 디자인도 마무리 단계이니 조금만 더 힘내 보자며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더 완성도 있는 서비스로 그 인내에 보답하겠다며 콘텐츠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즈음 최근 IT업계에 유행하는 3D 디자인 콘텐츠를 입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UI는 내가 전담하기로 하고, 3D 콘텐츠 디자이너를 찾아서 다소 밋밋한 프로덕트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도록 콘텐츠 디자인을 고도화하기로 결정했다. 신기하게 이번에도 유능한 인재가 먼저 문을 두드려 주셔서 토스의 3D 콘텐츠 인턴 디자이너분이 합류했다. 지금의 마일로에 귀여운 캐릭터로 생기를 불어넣어 준 고마운 인연 세희님! 이렇게, 또다시 프로젝트는 안전 고도로 들어서며 순항하는가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앞에 엄청난 악재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프로젝트의 Due Date는 다가오고 있는데, 앱은 도통 MVP 수준으로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디자인 파일과 개발 프리뷰는 너무 달랐고, 오류가 너무 많아 디버깅에만 몇 주가 더 소요될 것 같았다. 당시 개발자가 두 분이 계셨는데 서로 업무 스타일이나 성격의 차이가 너무 달라서 고충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최선을 다해 중재를 했지만, 어떠한 금전적 이익도 취하지 못하는 비영리 프로젝트 특징상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다시 잡기는 많이 어려웠다.
결국 또 개발자 한 분이 이탈을 하고, 이어서 다른 개발자 한 분도 나갔다. 프로덕트 매니저 겸 UI 디자이너 1명과 3D 콘텐츠 디자이너 1명만 남은 상황에서 황망한 마음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시 일어서서 개발자를 구인하기로 했다. 지금껏 만들어 놓은 코드 자체가 너무 오류가 많아서 새로운 개발자가 와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일 거라, 동료 개발자의 조언대로 차라리 개발 언어 자체를 바꿔보기로 했다. (당시에는 react-native 개발자보다 swift, kotlin 개발자의 공급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우수했었다.)
망설임 없이 React-Native로 진행해오던 파일을 전부 날려버리고, ‘0’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팀을 리드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괴로운 선택이었지만, 엉망진창인 상태로 새로 합류할 개발자에게 떠넘기기는 죽어도 싫었다. 바로 구인글을 작성했고,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Swift 개발자가 구해졌다. 마일로를 혼자 한 달여 만에 만들어 낸 대단한 분이다.
그러나, 이미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개발자분과 달리 기존에 있었던 3D 콘텐츠 디자이너분은 개발 언어를 바꿔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컨디션을 체크하고 잠깐 게더타운으로 커피챗을 요청했고, 무거운 말을 꺼냈다.
본인 : 유진(가명)님,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달 좀 넘는 시간 동안 React-Native로 만들어 온 프로젝트 파일을 전부 드랍하고, Swift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지금껏 만들어 온 앱을 얼기설기 마무리하는 것보다 Swift로 다시 시작하는 게 더 빠르고, 안정적이며,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팀원이 셀 수도 없이 자주 바뀌었지만, 저는 이 프로젝트의 끝을 꼭 보려 합니다. 딱 한 달만 더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게더타운 회의실에서 말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내용이었다. 얼마동안 정적이 흘렀을까, 디자이너는 오히려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맙다며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빌드해 온 파일들을 전부 삭제하고, 다시 출발선으로 향했다. 그때 우리는 디자인 파일은 그대로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며 서로 웃으며 농담까지 주고받는 여유까지 생기게 되었다.
잦은 팀원의 교체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멘탈이 너덜너덜해졌지만, 팀 리드가 지친 모습을 보이면 또 프로젝트가 흔들릴 거라는 우려에 힘든 내색은 최대한 하지 말자며 스스로 다짐했다. 팀은 이제 Product Manager 겸 UI Design 한 명, 3D Contents Design 한 명, Swift Dev 한 명. 이렇게 세 명으로 추려졌다. 그야말로 ‘어벤져스 어셈블’이었다.
단 세 명으로 과연 앱개발 프로젝트를 출시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우리는 마치 소수 정예의 특수부대처럼 각자의 필드에서 할 일을 처내며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갔다.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했었던 일들을 단 3주 만에 해내기도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팀원들이 어느 포인트에서 갑자기 의욕이 고취되어 열정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남았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딱히 동기부여 연설을 했었던 기억도 없었고. 그러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콘텐츠 디자이너분이 한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본인도 이 프로젝트가 끝까지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리더가 지쳐서 먼저 그만하겠다고 말하고 드랍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전부 밀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며, 반드시 이 프로젝트의 끝을 여러분과 함께 보고 싶다며 확신에 찬 말에 본인도 오기로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강제로 하는 게 아니라 즐기면서 하게 된 것 같아서 고맙다고.
나는 지금까지도 사이드 프로젝트는 뛰어난 스킬을 가진 사람들보다 0에서 1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일 때 훨씬 더 훌륭한 프로덕트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매주 만날 때마다 우리는 더욱 원대한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느꼈다. 주간 회의는 했던 일을 공유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다 같이 문제를 검증하고, 해결한 내용을 공유하며, 나아가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었고, 폭발적인 생산성을 갖춘 팀이 되었다.
결국 마일로 팀은 목표한 출시 날짜에 맞추어 앱스토어에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출시하는 순간 팀원들이 모두 구글미트로 ‘출시’ 버튼을 누르는 순간을 같이 지켜보았고, 축포를 터트린게 새삼 기억이 난다. 누군가는 앱 하나 마켓에 등록한 게 뭐 그리 유난이냐고 할 수 있지만, 마일로가 어떤 여정을 밟으면서 출시되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 너무 기뻤고, 팀원들한테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나는 아직 그간 기록이 담긴 Asana의 마일로 워크스페이스와 메신저를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본업을 하면서 일이 막히거나 힘들 때 가끔씩 들춰보며 혼자 추억하곤 한다.
나는 프로덕트 매니저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이 직업관은 제 브런치 한 줄 소개에도 자리하고 있다. 프로덕트 매니저의 업 자체는 디자이너나 개발자처럼 뛰어난 하드 스킬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조직 내에 누구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해야 하고, 완강하지만 감성적이어야 한다. PM은 조직 내 누구보다 환경과 상황에 흔들리면 안 된다. 제품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문제해결력을 바탕으로 팀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절대 제품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제품과 팀원을 이해하며 추진해나가는 리더. 그게 PM이니까.
이번 사이드 프로젝트 소감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정말 힘들었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이 쉴 새 없이 파도처럼 밀려왔었지만, 어느새 그런 거친 파도 위에서 험난한 서핑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두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참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필자는 이미 다음 사이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늘 그랬듯이 성장통을 겪으며 더 잘하게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더 성숙하고 능숙하게 프로젝트를 핸들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획서를 써내려 간다! (이 땅 위의 모든 IT 종사자 화이팅)
마일로와 함께 해 준 팀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채드윅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