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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Dec 08. 2022

탈색한 눈썹과 코뚜레 피어싱

그녀가 베를린에 오기 위해 만든 구실에 대하여


정확히 18일을 베를린에 머물고 있다. 아홉번째 날 저녁에는 중국 음식점에 갔는데, 볶음면이 많이 남아서 포장을 해달라 했다. 포장한 음식을 10일째 점심으로 먹었다. 차가워진 볶음면을 후라이팬에 쏟아내고 약불에 슬근슬근 볶는데, 웃음이 나왔다. 이거구나. 이거야말로 ‘사는것처럼 여행하기’의 진수로구나.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다음날 다시 먹기 말이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행위니까. 나, 여기서 ‘일상’을 보내고 있네. 막연한 안도감이 들었다.



어느 날 밤, 정석은 베를린에 사는 한인 친구들의 홈파티에 가자고 했다. 여기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홈파티라니.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다. 그들의 일상에 내가 마구 침입하는 것 같은 미안함이랄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봤지만 정석은 “너가 꼭 가야해”라고 이상한 고집을 부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인드세팅을 시작했다. 나는작가다. 나는 취재를 하러간다. 경험을 하러 간다.



‘나는 작가다’라는 낯간지러운 마인드 세팅은 새로운 상황에서 용기 촉진제 역할을 한다. 나는 관찰자. 나는 이방인. 나는 제 3자. 나는 기록자. 나는 잘 어울리지 못해도 된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 나는 경험하는 사람. 나는 무책임한 이방인. 세팅 완료!




억지스런 미소를 들으며 들어간 홈파티 현장에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힙스터들이 앉아 있었다. 차마 묘사를 할 엄두도 안나는 그 곳에서, 나는 얼어 붙었다. 모두가 의상을 잘 차려입은 연극 무대에 나 혼자 잠옷을 입고 올라 선 기분. ‘베를린의 일상’이란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었네. 낙담하려는데, 그 때.




빛나는 코뚜레 피어씽을 하고 눈썹을 탈색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옆에 앉으라고 말을 걸어왔다. 딱 봐도 기가 세보이는 외모에 나는 흠칫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의 동공은 어딘가 흔들리고 있었고 표정도 어수룩했다. 나는 생각했다. "찾았다, 내향적인 사람"







역시 내향적인 사람의 옆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탈색해서 잘 보이지 않는 눈써벝ㄹ과 코뚜레 피어씽을 한 그는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외모와 말투에서 오는 괴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모순적이어서 매력적인 아이. 친구가 될지도 몰라.




나는 이번 ‘오지탐험’에 계획이란 걸 전혀 세우지 않고 왔다. 돌아보면, 내가 퇴사를 한 이유도 ‘계획’에 있었다. 모든 게 예정된 삶. 내가 회사를 계속 다니면 1년 뒤도 3년 뒤도 10년 뒤도 예상이 가능한 삶을 살게 될 것 이었다. 그게 가장 싫었다. 팀장님이 12월까지 표를 그려주면서, 내가 할 일을 대략적으로 적어주던 그 날, 퇴사를 다짐했던 것 같다. 나는 우연을 좋아하는 사람. 여행을 떠날 때가 됐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던 날들이다.




그렇게 우연히, 그 날 밤, 그 친구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무역회사를 3년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워킹홀리데이로 베를린에 왔는데, 베를린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 그 때는, 클럽에서 노는 게 너무 행복했어.

탈색한 눈썹이 들썩거렸다.



-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베를린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컸어. 어떻게 하면 베를린에 살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학교를 가게 된거야. 늦은 나이에 다시 학부를 시작하게 됐어. 베를린에서.



진짜 이런 사람이 있구나. 5년에 한 번 꼴로 베를린에 가는 나는, 나 정도면 베를린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이런 사람이 있구나. 도시와 사랑에 빠져서 인생을 다시 조립하는 사람.





- 그럼 요즘도 베를린을 사랑해?

- 아니, 요즘은 많이 힘들게 해. 그래도,  공부를 하잖아 여기서. 공부를 하니까 계속 있고 싶고,  그래서 좋아.



빌미. 그에겐 빌미가 생긴거였다.

베를린에 계속 살아갈, 베를린을 계속 사랑할 이유.




인생이 지루해 질 쯤, 인간은 아기를 낳고 싶어지고, 인생이 지루해질 쯤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진다. 살아가야할 이유를 스스로 계속 보급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계속 살아가야할 단서를 찾는 우리. 그 단서덕분에, 새롭고도 온전한 길이 열린다.



베를린 대학으로 떠나는 일이 누가 보기엔 엄청난 신념같아 보여도, 그에게는 한 도시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 심어 놓은 계기이자 빌미였던 거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의 눈썹만큼이나 마음이 들썩였다.



놀라운 사건이 내 인생에 나타나길 기대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과’를 만드는 게 아니라 ‘원인’를 만드는 것 뿐이다. ‘결과’를 좇으며 조급해 하지말고 나는 이제 수많은 ‘원인’을 만들어가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예상할 수 없어 기쁘다.



동네를 걷고 또 걷다가 우연히 들른 레코드 가게에서 나는 새로운 ‘하우스/일렉트로닉’ LP판을 샀다. 우연히 들른 페미니즘 서점 ‘She said’에서는 흑인 페미니스트의 에세이를 샀고, 환경/식물 서점에서는 ‘돌봄’에 대한 책을 샀다. 베를린에서 만난 음악과 책과 사람들. 이 모든 우연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도대체 예상할 수 없어서 든든하다.



2022년 가을 베를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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