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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비를 내려주세요

by 정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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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배경음악은 크리스 리아의 Driving home for Christmas로 하자. 너무 좋은 크리스마스노래인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

Chris Rea ~ Driving Home For Christmas (1986)


새벽에 문득 감성이 차올라 얼마 전에 초안을 썼던 글을 페북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의외로 좋아한다. 역시 페북은 온라인 경로당이라더니 사회적으론 아무런 의미도 없을 평범한 중년 남성의 연애 후일담 (심지어 연애조차 아닌)을 이야기를 귀 기울여 읽어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나야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약간은 심각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썼으니 균형에 맞추기 위해 약간은 웃기고 멍청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베르그송은 모순된 것들의 충돌이 유머의 본질이라고 했다.


예전에 누가 내게 '옛 여자친구 이야기 써도 형수님께 괜찮아요?'라고 하고 걱정하며 물었는데, 이건 이미 괜찮고 괜찮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데이터'로 보유하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C와의 추억도 아득해져 갈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나는 방구석에서 초폐인들의 게임인 에버퀘스트라는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유명한 WOW,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조상님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서버만 7200시간 플레이 기록이 있다.)


창밖에는 오랜만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화이트크리스마스였다. 게임 내에서는 이 좋은 날 데이트는커녕 게임이나 하고 자빠진 루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누군가가 "야이 빌어먹을 눈까지 오네!!!!"라고 전체 외침으로 채팅창에 치니까 공감하는 솔로들의 비명이 채팅창을 가득 메웠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에버퀘스트 한글판을 서비스하던 NC 소프트에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크리스마스 이벤트랍시고 게임 내에 눈을 오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 거 좋아하는 놈들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날 게임을 하고 있겠냐?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눈을 맞아야 하는 솔로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채팅창에 욕설이 올라오던 때, 누군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비를 내리게 하자.'


게임 내 클래스의 하나인 드루이드는 고레벨이 되면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날씨변화 마법 시약이 너무 비싸서 아무도 그 스킬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게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개발자가 그냥 재미로 만든 스킬일 뿐이었다.


우리는 고렙 드루이드하나를 섭외했다. 화이트크리스마스에 열받은 게임 내 수많은 게이머들이 게임 내 지갑을 털어 금화, 은화, 동화를 들고 안토니카 대륙의 자유항으로 모이는 장관이 펼쳐졌다. 순간이동 마법이 없어서 그거 하자고 20분씩 걸려 다른 대륙에서 배를 타고 오는 불쌍한 놈들도 있었다. 루저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은 잃을 게 없다.


충분한 돈이 모이자 드루이드가 마법을 시전 했다. 어중간한 캐릭터라 어디 가도 찬밥신세였던 드루이드가 수천 시간을 낭비해 레벨 업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스킬을 시전 했다. 내리던 눈을 싹 비로 바꿔버리자 게임 내 광장에는 환호성이 터졌다. 그런데 어떤 나쁜 놈이 게임 운영자에게 항의를 해서 10분도 안 걸려 다시 눈으로 바꿨...


다시 눈 내리는 화면을 보며 나는 접속을 종료했다. 불 꺼진 배 나온 CRT 모니터에 내 얼굴이 비쳤다. 아니 한때는 예쁜 여자친구도 있었고 인기가 없지도 않았던 거 같은데 크리스마스 때 게임머니나 모아서 비나 내리게 하고 좋아하는 내 처지가 사무치게 한심했다.


그래서 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들을 생각하는데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인지 순서가 헷갈리는 것이었다. 쓸쓸함이 독이 되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내 생에 저지른 최고로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름, 만난 시기, 특징 등을 정리해서 '역대 여자친구 일람표'를 엑셀 도표로 완성했다. 기억을 더듬어 정성을 들여서는 그런 걸 만들어 놓고는 그걸 일기장에다 끼워놓은 후 정말이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내 팔자에 없던 장가를 가게 됐다. 결혼을 한다고 하니 내 주위 친구들 대부분이 의아해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내가 해외 출장을 가자, 신부가 될 사람 (다행히도 지금의 아내)이 내 집에 짐을 챙기러 갔던 것인데, 누가 봐도 일기장 같은 걸 책장에서 발견하고 당연히 그걸 집어 들었으니...


그렇다. 사실 내 과거 기록은 아내에게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아내는 대부분이 흑역사인 내 과거를 정리된 데이터로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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