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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Mar 01. 2024

옳은 일을 하는 것의 의미

후회처럼 괴로운 것은 없다. 


세상을 정말로 1mm 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려면, 개인이 자기 주위에서 할 수 있는 선행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슬프게도 그것 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대학교 다닐 때 나는, 새벽에 검도도장에 가서 운동하교, 저녁에는 학교 검도부에서 운동하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하루에 20킬로 정도 동선을 자전거로 통학하는 검도 바보였다.


 검도장에서 새벽에 인근 중학교의 검도 특기자들과 같이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 비인기 종목의 특기자라는 게, 그 운동이 정말로 좋아서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사고를 치거나, 성적이 안돼서 고등학교를 갈 수학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학교 선생(존칭을 써서는 안 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중 검도 선수 출신 하나가, 학교에 검도부를 만들면서 그 도장과 자매결연을 맺어 운동을 시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 놀란 것은,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 밖에 안된 아이들의 눈에 어린 독기였다.

자세히는 묻지 않았지만 폭행, 금품갈취 등 여러 이유로 퇴학을 앞두고 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써 운동을 택한 아이들의 경우 특히 심했는데, 처음 보는 사람, 어른들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이 툭툭 배어 나왔다. 


운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육체와 기술의 단련 과정에서 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검도의 경우 타인의 마음을 읽는 운동이다 보니 같이 땀을 흘리고 칼을 맞대다 보면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읽게 된다. 근본적으로 검도는 정신적인 운동이다. 


새벽에 만나 힘들게 운동하며 같이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는데, 내가 소위 세상의 ‘문제아’들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 경험이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문제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갖고 있었다. 


가장 독기 어린 눈을 갖고 있던 아이의 경우 어머니가 새어머니였고 그 새어머니는 자기 스스로도 ‘잘해주고 싶으나 자꾸 미움이 생기는 상태’에서 그 아이에 대한 표면적인 관심과 가정 내에서의 학대가 아이를 내면으로부터 파괴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아이의 경우 뜻밖에도 운동에 재능이 있어 곧 당시 서울시내 검도 특기자 중에서도 탑급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검도에서 자기 가능성을 발견한 그 아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지금도 반항적인 아이들을 보면 마음 구석이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아이 때문이다. 유진아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면서 살고 있니? 어디에서건 정말로 잘 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아마 운동부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지도 선생이 학부모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모든 명목의 갈취행위였다. 지도 비용은 물론이고, 싸구려 운동복을 비싸게 강매를 한다든지, 운동의 거의 모든 면에서 아이들을 빌미로 학부모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까웠던 경우는 운동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이었는데, 격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의 한계는 명확했다. 단지 고등학교를 가겠다는 이유로 운동을 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도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때 든 것은 저 애들에게 기본적인 학력을 길러주는 게 저 애들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특기자로, 검도선수로 큰다 하여도 수학과 영어를 잘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운동으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저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적당히 공부를 하는 것은 운동보다 훨씬 효과적인 일이다. 


새벽운동이 끝나고 나면 잠시 시간이 생겼고, 아이들에게 수학과 영어의 기본을 가르쳐 주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공부를 꽤 잘해본 일도, 아주 못해본 일도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어떤 부분에서 잘 못하는지 이해를 빨리 하는 편이다. 한두 달 만에 성적이 바닥을 긁던 아이들이 괄목할 만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은 내게 큰 보람이 되었다. 내 목을 껴안으면서 형이 제일 좋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들과 땀을 흘리며 죽도를 맞대고 웃통을 벗고 탈의실에서 수학을 가르쳐 주는 건 당시 내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그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은 검도를 지도하던 선생이, 내가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빌미로 학부모들에게 추가로 돈을 갈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나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알지 못한다. 훗날 그중 한 명이 나중에 신천 유흥가에서 삐끼일을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서로를 알아보았지만 외면했다. 생각하면 다시 한번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봉사를 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됐다. 그 선생을 교육청과 검찰에 고발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도 세상에 만연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그럴 지혜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 후회는 평생 지속되는, 온전한 나의 것이다. 


분명히 그건 내게는 큰일이었을 거고, 상대와, 나와 관계가 있는 주위 동료들을 통한 회유와 협박이 따랐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큰일이었을 것이나, 지금 내게는 가소로운 수준일 게고, 그때 그 과정을 이겨냈으면 나 또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뿐이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분명히 훌륭한 일이지만, 정말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심지어 나의 선행이 나쁜 시스템을 존속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실제 기부액의 5% 이하만을 기부 대상에게 전달하는, 길거리에서나 우릴 붙잡거나 인터넷 브라우저에서 귀찮은 팝업으로 우리에게 계속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자선기관들도 그런 시스템의 일부이고, 인간의 약점을 수익화하는데 능한 종교집단도 마찬가지다.  선의로 그들을 돕는 것은 그들의 잘못된 행태를 지속시키는 일이다. 세상이라는 밑 빠진 독에 약간의 물을 붓는 것은, 자칫 그 밑 빠진 독을 계속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선의를 세상에 행한다는 것은 여유자원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이상의 희생과 헌신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정말로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잘못된 시스템에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집단에게 불편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걸 흔드는 사람은 불편한 인간이 되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적을 만드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나아가 그 적이 나를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지간한 적은 압도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이길 수 없는 강대한 적이라면 내가 패할지언정 상대를 어디 한구석 병신을 만들어 버릴 각오로 싸워야 무슨 일이든 실제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한 힘든 과정이 그저 헌신인 것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보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 일이 옳은 일이기에 할 뿐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일을 하면서 왜 상대가 감사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는가?

외로움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고 우리는 모두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 우리는 다 시시한 사람들이고 자신의 한계가 있다.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도 제대로 감사하지 못하는데, 선행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나에게 감사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처럼, 내 선행으로 도움을 받을 미래의 누군가 처럼, 감사할 대상이 특정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호의는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게 어디선가 또 다른 싹을 틔운다면 그건 정말 그건 기쁜 일이지만 이미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또한, 선행을 베푸는 타인이 이런 책임까지 지지 못했다고 해서,  단순한 자선에서 끝내려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대부분은 약하고 바쁜 사람들이며 우리 자신의 지옥을 짊어지고 산다. 우리 한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니 그 사람이 좋은 의지라도 가졌다면 존중하고 감사할 일이다.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단순히 좋은 뜻을 가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우리라면 그 사람 또는 집단을 지지하고 응원할 책임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삶과 선한 의지가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책임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헌신과 자기희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진정한 힘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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