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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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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Dec 20. 2024

어느 감독의 소년-시절

그때 그곳 그 사람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영화 <파벨만스>를 봤다.

한 평생 영화를 만들고 영화계에 몸담으며 그 희열과 좌절, 번뇌와 경외감을 온 몸으로 겪었던 한 사람의 자기 이야기이다. 특히 그의 소년-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시절의 특수함은 무엇일까? 소년기란 자기보다 세계가 너무도 큰 상태이다. 세계의 힘과 권력 속에서 각각이 강하고 강렬한 사람들과 마주하며 작은 자신을 틔워내려는 시간이다. 이 거대한 존재들에 비하면 사소하고 무력한 나, 몸의 불가해한 작동들과 마음의 종횡무진에 함께 흔들리는 나로서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움, 호기심, 사랑으로 주변을 탐색하고 온몸으로 유영하며 속살처럼 느끼는 시기이다. 이 영화는 이 시절의 민감함과 순수함, 힘과 유약함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비춘다.

한 아이가 영화를 만나고 영화를 만들고 그 길로 나아가기까지의 시간은 한 편의 따뜻한 이야기가 된다. 이 시절은 딱딱한 정보나 직접적인 구술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움직임과 대사로 생생하고 섬세하게 담겼다. 주인공 새미 파벨만스가 생애 처음 본 영화와 그 이미지에 사로잡혀 만들었던 첫 비디오라든지. 영화 매체를 이루는 물질들, 예컨대 필름, 영사기, 카메라, 편집기 같은 기계들에 매료되어 이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탐색하며 기꺼이 얽히고 기꺼이 고립되어 보낸 시간들. 영화관에 새로이 걸린 영화들을 탐색하고 이를 따라하며 영화 매체의 역사와 관습이라는 그물망에 몸을 즐거이 담근 시간들.



그리고 새미가 찍은 영화들도 중간중간 상영된다. 필름에 기록되고 자르고 붙여짐으로서 특별하게 바뀐 가족들의 일상적 순간들이랄지, 애리조나의 흙먼지 가득한 사막에서 친구들과 찍은 전쟁 영화랄지. 필름과 영화의 비밀을 경탄하듯 발견하는 호기심 어린 시간들이다.


이 시기 함께했던 사람들도 영화 속에서 각각 솔직하고 생생하다. 학창 시절 새미의 영화에 기꺼이 출현해준 보이스카우트 친구들은 그 각각의 개성이 실감나게 담겨있다. 가족과 주변인들은 새미에게 카메라를 사주고 벽장을 영사실로 바꾸도록 두고 새미가 그의 방식대로 펼쳐지도록 마음으로 응원한다. 이들은 한 명 한 명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삶에 대한 주도권과 통제력을 보여준다. 새미가 어린이에서 성인으로 자라나는 동안 '부부간 불화', '이혼', '학교 폭력', '부적응', '진로갈등' 등의 일반화하는 투박한 단어들로 담기지 않는 사건들이 다면적으로 펼쳐진다. 그 사람들과 삶들이 어떻게 소년기의 새미의 마음과 얽히는지, 그들이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미의 정서적 뿌리이자 심리적 지지대가 되었는지를 영화는 섬세하게 그린다. 새미 파벨만스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의 감수성이 형성되고 특정한 방향으로 시선이 이끌리고 의미망이 짜이는 동안 옆에 있던 사람들 각각을 영화는 존중하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준다.

새미에게 (그리하여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그래서 감독의 소년기를 회고하는 이 작품에 영화적 재현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오프닝 시퀀스에서 부모님과 생애 첫 영화를 보러 갈 때 겁을 먹은 어린 새미에게 엄마가 눈을 맞추며 하는 말 "영화는 꿈 같은 거야." 옆에서 아빠는 열의에 들떠 영화를 기계적 구성 요소와 과학적 작동원리로 해부한다: ‘영사기는 일초에 24개의 사진을 재생시키는 장치이고, 뇌에서 각 사진이 1/15초 만큼 지속되기 때문에, 영사기는 우리의 뇌가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빨리 사진을 교체해 정지 이미지가 활동하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하는 거란다-!


한편으로 영화는 맨 눈으로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족 캠핑 영화를 편집하면서 그 날에는 보지 못했던 엄마와 아저씨 간의 불륜 장면을 발견하게 될 때처럼 영화는 인식을 가능케 하고, 기록과 회고를 통해 진실과  마주 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화가 피사체에게 미치는 단순하지 않은 영향력도 드러난다. 새미의 가족 영화는 할머니를 잃은 어머니의 상심을 위로하는가 하면 졸업 파티를 위해 만든 영화에서 영웅적으로 비추어진 친구는 새미가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에 부담과 괴리를 느끼기도 한다. 영화적 재현이 피사체의 심리적인 요인과 얽혀서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 전체를 통해, 또 마지막 장면을 통해 스필버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영화란 특정한 시선(앵글)으로 이야기를 담아내는 매체라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영화에 출현하는 배우들, 영화의 로케이션, 이야기를 사전에 조율하고 규정함으로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어떤 이미지로 어떻게 담고, 이를 어떻게 붙일 것인지, 영화 속 세계의 지평선을 어디에 두고, 영화라는 한 단위의 시간과 그 형식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있다.


예컨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영화계 일자리를 찾는 새미는 세기의 감독 존 포드와 짧은 독대를 할 기회를 얻는다. 스필버그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이 장면에서 존 포드는 자신의 사무실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며 지평선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 다그친다.


“아니 아니 아니, 그놈의 지평선이 어디 있냐고.

됐어, 이리로 와봐.

이걸 기억해, 지평선이 화면 아래에 있으면, 그건 흥미로워. 지평선이 위에 있으면 그것도 흥미로워. 지평선이 가운데 있으면? 아주 더럽게 지루하지.

그럼 행운을 빌고, 이제 내 사무실에서 나가.“


내 이야기의 지평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세계는 자신의 방식대로 작동하고 삶이라는 시간은 이미 그렇게 일어났지만, 그 안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회고하고 연결해 이야기를 짓는 것이다. 삶이라는 재료로 어떤 이미지를 만들고 이야기를 펼쳐낼지를 선택하는 데서 인간은 일말의 주체성과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로서의 <파벨만스>는  우리가 인생의 이야기를 어떻게 편집하는지, 그리고 이는 어떤 여파를 갖는지를 그 내러티브와 영화에 대한 성찰을 통해 보여준다.



*​

내가 잊고 묻어두었던 나의 '못난' 소녀-시절, 걸-후드를 마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요즈음, 스필버그의 방식이 용감하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슬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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