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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Apr 05. 2019

글을 잘 쓰기 위해 잊어야 하는 것

15년 전 내가 방송사 시험을 보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PD 지망생들은 방송사 작문 시험을 위해 스터디를 만들어 대비해왔다. 작문 스터디는 나름 전통 있는 준비법이다. 그런데 나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그 흔한 작문 스터디는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강권한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작문 스터디에 들어가면 모일 때마다 글을 한 편 쓴다. 부원들이 돌아가며 주제를 내면 대략 한 시간 동안 글을 써서 내야 한다. 낯선 주제를 소화하기 위해 끙끙거리다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만족스럽지 못한 원고들을 모아 복사해 읽고 돌아가며 피드백을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원고를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원고는 늘어나지만 실력은 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학생이 많다.


약간의 변형은 있겠으나 이런 패턴은 스터디마다 대동소이하다. 사실 작문 준비를 해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 이유는 스터디 방식이 글 쓰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말하고 싶은 얘기를 간절하게 전하는 과정을 통해 향상된다. 연애편지와 비교해보자. 우선 구애라는 목적이 있다.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인다. 너무 늦게 편지를 주면 인연을 놓칠 수 있고 급히 주면 글이 한심하여 부끄러울 수 있다. 그래서 글을 마치는 시간도 고민 끝에 정한다. 나름 최상의 글을 쓰기 위해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한다. 관련 서적도 뒤져본다. 그러다보면 대충 봤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신(2막2장)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왜 이 작품이 세기를 거듭하며 살아남았는지 알 것 같다. 한편 자신의 글은 전보다 더 작아 보인다. 그만큼 보는 눈이 열린 거다. 


작문의 결과 역시 현실적이다. 편지가 모든 것을 좌우하진 않지만 그 역할이 어땠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다. 퇴짜를 맞으면 글을 다시 곱씹으며 다음 기회에 더 나아지길 바란다. 그런 과정에서 글은 조금씩 늘어간다. 어떤 목적을 두고 글을 쓰다보면 글 좀 쓴다는 소리도 머지않아 들을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자료를 찾는 것부터 글을 쓰고 다듬고 또 다듬으며 냉정한 독자 앞에서 벌거벗겨져 평가를 받는 모든 과정이 글을 쓰는 일이다. 준비도 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 목적이나 욕망 없이 쓰고, 거기에 동료의 피드백을 받은 후 다시 쓰지도 않은 글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문 스터디는 시험을 모사하고 있다. 결국 시험이란 환경 아래서 글을 써야 하니 그런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보편화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경쟁률이 지망생들을 숨 막히게 만든다. 열에 하나가 필기시험에 통과한다니 대단한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고수들의 혈투를 예상하겠지만 사실 ‘어느 정도 말만 되면 통과’하는 게 작문 전형이다. 


시험 문제가 상당히 어려운 것도 시험 대비에 집착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가끔 출제자가 개인의 창의력을 과시하고자 현직 PD도 못 풀 문제를 내놓기도 한다. 곡예를 하려면 남다른 훈련이 필요할 것만 같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기본 실력이 없는 사람이 시험장에서 마술을 부릴 수는 없다.


사실 이런 스터디 문화가 수십 년 이어진 이유는 보다 깊은 곳에 있다. 학생들은 시험이 아닌 때에 글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니 글은 원래 시험 보듯 쓰는 것이라 착각한다. 어릴 적부터 글은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그리 해도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D들 중에 언론고시생 생활을 하지 않고 단박에 입사한 이들이 꽤 많다. 소설이나 시나리오 쓴다고 헤매고, 평론가 되려고 끙끙거리다 어느 날 시험장 갔다 덜컥덜컥 합격하는 거다.
                

PD 지망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좀처럼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들은 시험이라는 게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듯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라고 하면 등에 식은땀부터 난다. 시험으로 글쓰기를 공부하며 생긴 내상 때문일 것이다. 글은 잘 쓰는 사람만 쓰는 것도 아니고, 잘 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쓰려면 시험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 앞으로 시험을 봐야 하는 사람도, 아주 오래전 시험을 봤던 사람도.


2019.03.04 20:54:06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042052005&code=990100#csidx64b5cefa412a9b09c6204dc94bb5a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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