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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Apr 05. 2019

직장에도 민주주의가 닿고 있다

며칠 전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우석훈 저)를 읽었다. 그저 직장 생활에서 오는 우울감을 달래볼까 싶어 집었는데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어 푹 빠져 읽었다. 뉴스를 채우는 수많은 갈등은 멀리서 보면 시대정신이라는 전선을 형성한다. 그런데 요즘 여러 사건들이 어지럽게 벌어져도 그것을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전선에 ‘직장 민주주의’란 이름을 붙이니 많은 것이 선명해졌다. 
  

촛불로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리며 정치적으로 높은 민주주의 의식을 보여준 시민들이지만 직장 문만 열고 들어가면 봉건 사회에서 일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IT업체 직원은 사장에게 두들겨 맞아도 참아야 했고 간호사들은 기강이라는 이름 아래서 태움을 당해야 했다. 어떤 승무원은 오너의 딸이 문제 삼은 땅콩 때문에 울분을 삼키며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고, 다른 항공사에선 회장님 앞에서 ‘재롱 잔치’가 벌어졌다. 매장에선 손님이 갑질하며 무릎을 꿇게 해도 직원은 그 수모를 견뎌야 했다. 잘릴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그렇게 만들었다. 현직 검사는 성추행을 당해 항의한 뒤에는 좌천당해야 했다. 방송사에선 얼마 전까지 장시간 노동이 사명감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어 왔다. 함께 일했던 어느 작가는 전에 MC 한 명이 자장라면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녹화 때마다 대기실 앞에서 부르스타에 불을 올려야 했다며 씁쓸해했다. 어느 대학 조교는 여전히 담배 심부름을 하고 있고 교수 자제분이 결혼하면 청첩장을 접어야 한다. 


어느 특이한 회사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 말하기 어렵다. 여전히 육아휴직을 쓰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엄마들, 노래방에 끌려가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불러내야 하는 사람들, 퇴근 시간이 오면 존재하지 않는 절묘한 타이밍을 위해 헛되이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해야 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나아가 불법이 강요되어도 해야 하거나 모른 척해야 하는 상황이 적지 않게 벌어진다. 직장은 가정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닿지 않는 ‘가까이 있는 변방’이다.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이 대표이사직을 잃었다. 국민연금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사실 조씨 일가의 추락이 거의 ‘괘씸죄’ 때문이었다는 것에도 방점을 찍을 만하다. 횡령 등 각종 범죄에도 경영권을 지켜 온 다른 그룹 오너들과 비교했을 때 대한항공 오너 일가가 벌인 일련의 사건들은 한편으로 사소해 보이지만 직장인들이 폭넓게 느끼는 공분 포인트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폭발력이 컸다. 조 회장의 대표이사직 상실은 직장 민주주의 결여가 회사 경쟁력 부족의 원인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직장 민주주의는 시기상조이거나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어차피 남의 돈 먹는 건데 말 안 들으면 어쩌자는 거냐는 생각도 뿌리 깊게 자리 잡혀 있고, 존망을 두고 일사불란해야 하는 조직이 민주적이면 일이 되겠냐는 생각도 흔했다. 하지만 조직의 비민주성이 조직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슬슬 체감하기 시작했다. 또 젊은 사람들이 직장을 선택하는 데 ‘직장 내 분위기’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급여가 적더라도 ‘좋은’ 회사에서 일하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선진적인 기업들이 앞장서서 직장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그곳에 인재들이 몰릴 거다. 우석훈 선생의 말처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지만 절에는 땡중만 남는다. 미투 운동을 꽤 많은 젊은 남성들이 지지하고 있다. 그건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미시 파시즘과의 대결이라고 말할 때 가장 선명하게 이해된다. 
                

국가의 민주화는 시민들이 다른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딜 수 있지만 기업의 민주화는 노동자가 직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쉬운 일이 될 수 있다. 인력이 넘치고 자리가 부족한 시대라 해도 말이다. 다만 직장 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을 우리가 얼마나 가질 수 있고 요구하느냐에 따라 속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직장 생활에서 오는 남모를 우울감이 거대한 우울감의 한 조각이었다는 기분이 들자 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그리고 연결된 어딘가엔 일 때문에 사람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있으니 우리의 감수성을 이 연대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2019.04.01 20:47:44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401204700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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