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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Nov 03. 2019

아주 성실한 리스너

어떠한 판단이나 편견 없이 듣는 일

밑도 끝도 없는 긍정은 현실감이 떨어지고, 대책 없는 위로는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고민 상담은 어렵다. 상처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기보다는 기필코 똑같이 돌려줘야 뒤틀린 심사가 풀리는 나는 현명한 해결책 대신 복수할 방법을 여러 개 준비하는 아주 고약한 여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나에게도 고민을 상담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마주 앉아 어렵게 입을 떼는 심란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거 참 난처한데’라는 생각이 ‘오죽하면’ 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막막하고 짜증나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내보이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아마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민 상담을 하게 되는 그 순간에는 나는 아주 성실한 리스너가 되고자 한다.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으면서 편견은 배제한 채 오롯이 듣는 일에만 충실해지는 것이다.


회사 동료의 결혼식 축의금으로 5만 원이냐 10만 원이냐 하는 것부터, 이따 저녁에 모처럼 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늘어난 팬티를 입었다고 하소연하며 과연 오늘 팬티를 보여주는 일이 생길까 하는 고민까지. 이런 작고 사소한 고민은 귀엽지만 내가 차마 어떻게 할 수 없는 내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듣게 될 때는 무릎을 모으고 허리를 곧추세워 자세를 바로잡게 된다.


“정신과 상담 받고 왔어요.”

꽤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얼마 전 조심스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무기력이라는 부작용이 생긴 것 같다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이 나에게 고민을 상담해 오는 일은 정말이지 난이도 최상이다. 게다가 나 또한 무기력에 대한 면역력은 제로인 걸. (정자세로 앉아 ‘나도 잘 모른다고! 묻지 마!’라고 외쳤다. 마음속으로.)




영화 <돈 워리>의 남자 주인공 존 캘러헨은 음주운전 사고로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된다. 알코올 중독으로 전신마비가 되었는데도 술을 끊지 못한다. 결국 존은 동네 알코올 중독 모임에 나가게 되고 멘토 도니와 중독자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은 도니의 집 거실에 모여 빙 둘러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존은 모임에 나갈 때마다 멘토 도니가 준 미션을 하나하나 해 나가면서 자신이 맞닥뜨린 불행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조금씩 극복한다. 마치 레벨 업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 레벨 업의 끝에는 타인을 용서하는 일과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일이 있었다.


<돈 워리> 중에서 도니의 집 거실에 빙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존이 불행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극복 의지가 얼마큼인지 그리고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실천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여부가 자기 성장의 결정적인 포인트라고. 이건 단순히 내 주변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함께 ‘말하고 듣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다.




말하기와 듣기는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과정이다. 나를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다른 사람이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닫힌 문을 여는 힘 같은 것.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어떠한 편견 없이 듣는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상대가 차마 말하지 못한 것까지 듣는 사람으로 레벨 업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d-diB65scQU


경쾌한 휘파람 소리로 시작하는 기분 좋아지는 노래가 있다. 바비 맥퍼린의 Don't worry, be happy. ‘걱정 말아요, 행복해질 거예요.’라는 초긍적적인 가사가 어떨 땐 너무 얄밉고 어떨 땐 너무 위로가 되는 걸 보면 결국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듣느냐는 본인의 몫이다.




* 요즘 팬티들은 얼마 입지도 못하고 빵구가 나던데. 왜 그럴까요?

* 참, 저의 경우에 무기력에는 대체로 ‘존버’가 약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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