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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Jul 12. 2020

사회적 혼자 두기

뚝배기 한 그릇에 담긴 아빠의 작은 마음

초여름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려던 찰나 에코백 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빠의 전화였다. 핸드폰 너머로 “비도 오고 소주 한잔하고 싶은데, 우리 딸이 오늘 아빠한테 귀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라며 넉살 좋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추어탕 한 그릇씩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추어탕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일단 음식 이름에 ‘추’자가 들어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재료가 미꾸라지라는 게 상상만으로도 혀 끝에 비린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년 전, 회사에서 일박이일 워크숍을 마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김 선배를 만나 연희동에 있는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 주문한 추어탕을 한 숟갈 먹고 나는 감탄해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깊은 맛을 낼 줄이야, 추어탕을 먹지 않았던 그간의 세월이 아깝다”는 내 말에 선배가 웃었던가. 여하튼 당시 나는 배가 고플 대로 고픈 상태였고 말이 워크숍이지 실상 화합을 빌미로 대표의 한탄을 들어주는 자리를 일박이일씩이나 보냈으니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게 사실. 그런데 이게 웬일, 추어탕 한 숟갈에 대표의 한탄, 상사의 진상, 관심 1도 없는데 억지로 들어줘야 하는 동료의 연애담 등으로 얼룩진 내 속이 미꾸라지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가듯 말끔하게 스르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추어탕 당신은 위대한 음식! 나는 미꾸라지와 추어탕을 발명한 최초의 사람과 비린내를 감쪽같이 없앨 줄 아는 식당 주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싹싹 긁어먹었더랬다.




집 근처 아빠의 단골 추어탕 가게에서 각자 잔이 빌 때마다 서로 말없이 술을 채워주었다. 유리문에 맺힌 빗방울들이 사선으로 세차게 흘러내렸다. 다닥다닥 붙었다가 흘러 떨어지는 모습이 몸집이 가벼운 희망 같기도 하고 끈질긴 절망 같기도 했다.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는 듯 나와 아빠를 조롱하는듯 비가 쏟아진다.


친구랑 자주 오는 곳이라고 맑게 웃더니 가격이 천 원 정도 올랐다며 짙은 눈썹을 꿈틀대던 아빠가 술잔을 들어올리다 말고 조용히 한 마디 뱉었다.


“한 달 정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도 자주 했던 생각이고, 살림살이에 지친 엄마가 종종 소리지르듯 했던 말이기도 했는데 아빠한테 들으니 새삼 낯선 단어. 혼자.

전 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높아진 불안감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이어지고  그제야 고독을 버티는 각양각색의 방법들이 공유되고 있다지만 가족들 틈에서 나 자신을 혼자 두는 시간은 또 다른 이야기 같다.


오직 혼자일 수 있는 자유에는 얼마치의 가격이 매겨질까. 그건 월세 혹은 전세라고도 불리우고, 서울권 혹은 수도권이라고 불리우고, 역세권이라고도 불리우며, 원룸이나 투룸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바람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건물이 빼곡하게 밀집되어 있는 동네에 위치한 다세대주택의 작은 공간에서 에어컨 없이 한여름 더위를 버티다 못해 염치 불고하고 친구 집으로 뻘줌하게 피신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곳. 일용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고시원과 여인숙에서 안전과 위생을 보장받지 못하고 하루치의 삶을 연장하는 곳. 부동산 고공행진을 잡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정부와 탄압이라도 당한 듯 영혼을 끌어모아서라도 부동산을 사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일부 국민들 그리고 그 싸움에 끼지 못하고 치솟는 주택 값을 황망히 올려다보기만 하는 무주택자들이 공존하는 곳. 세면대 있는 집에 살고 싶다며 젊지도 늙지도 않은 청장년들이 새벽녘 짐차에 택배상자를 싣고 허옇게 뜬 얼굴로 까만 도로 위를 달리는 곳.


눈치 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혼자가 된 자유를 느끼는 안전한 공간을 얻기 위해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의 바람이 순진하다고, 영 시원찮다고 계산기가 0의 개수만큼 비웃는 것 같다. 혼자인 기분, 혼자가 가능한 공간은 어쩌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사치가 아닐까.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날까, 묻는 아빠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술잔을 비운다. 어느새 바닥이 보이는 추어탕 뚝배기 그릇이 유난히 커 보인다. 하늘을 짊어진 아틀라스는 아니더라도, 딱 저 뚝배기만한 크기의 삶을 떠받치고 살아도 괜찮다면. 적당히 좁고 적당히 깊은 그릇에서 적당한 기쁨과 슬픔을 품고 살 수 있다면. 나에게 꼭 맞는 뚝배기 안에서 다리를 쭉 펴도 공간이 남아서 상하좌우로 데굴데굴 구르는 작은 미꾸라지가 되고 싶어졌다.


앞서 걸어가는 아빠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고 걷는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쓴 우리 둘이 왠지 뚝배기 같다.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집으로 간다.


“우리 딸, 청약은 들었지?” 대뜸 묻는 아빠에게 나는 걱정 말고 당신의 노후를 신경 쓰라고 쏘아붙인다. 미끌미끌 능글 맞은 미꾸라지 같은 딸이 되긴 글렀다. 미끄럽게 굴곡을 헤쳐나가고 매끄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은 언제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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