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빨대와 비수를 들고 쫓아오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속 '호구마' 에피소드는,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호박고구마를 ‘고구마호박’이라 잘못 말한 나문희(시어머니 역)를 향해, 박해미(며느리 역)가 “고구마호박이 아니라 호박고구마예요, 어머님”이라고 정정한다. 평소 따박따박 자기 할 말만 하는 박해미에게 불만이 있던 나문희는 빈정이 상한다. 하지만 박해미는 그칠 줄 모르고, 그 뒤에도 나문희가 말실수할 때마다 “호박고구마라니깐요”라고 번번이 지적한다. 짜증이 난 나문희는 급기야 ‘호구마’라는 엉뚱한 단어를 말하고 만다. 박해미가웃으며 고쳐주려고 하자 울화통이 터진 나문희는 소리를 지른다.
“호! 박! 고! 구! 마!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 이제 됐냐?”
숟가락을 던지고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우는 그를 보며 나머지 가족들이 짐짓 당황한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매번 웃고 또 줄곧 생각했다. 시트콤 속 박해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고 싶은 말을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면 인생에 스트레스 같은 건 없겠다고. 하지만 현실의 나는 빈정이 자주 상하고 매일 밤 잠들기 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라며 이불을 차다가 결국 엉뚱한데서 그동안 참아온 감정을 터뜨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나문희에 가깝다.
나문희가 난감한 얼굴로 ‘호구마’라며 실수처럼 내뱉은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건 호구처럼 마냥 착하지도 않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는 박해미 같은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착한 주제에 어설프게 못되기까지 한 사람들에게 나는 ‘호구마’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호박도 고구마도 아닌 정체불명의 호구마처럼 애매한 사람. 조금 더 솔직하자면 바로 나같은 사람이다.
돌이켜보면 인간관계에서 늘 엉뚱한 노력들을 해왔다. 내 본모습은 숨긴 채 주변에 완벽하게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욕 먹고 싶지 않아서 착해 보이려 노력하고, 거부 당하고 상처받을까 봐 스스로를 쿨한 사람으로 포장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진짜 나는 희미해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나만 남았다. 버럭 화를 내고 뒤돌아서자마자 혹시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사람에 대한 콩깍지가 조금씩 벗겨진건, 삼십 대에 들어서고 나서다. 관계에 일희일비하고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겨우겨우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함이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줄이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에게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해 잘라내는 일, 이건 어쩌면 편집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산책이나 일을 마친 뒤 마시는 맥주같이 매우 중요한 것들은 분량을 늘리고, 불필요한 야근이나 모임처럼 하찮은 건 과감하게 생략하는 작업이 인생에 좀 필요하지 않나.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려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내가 나다울 수 있도록 온전히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한다.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를 힘겹게 끌어안고 갈 필요는 없다.
인간관계에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만 상처받고 끝나는 노력보다는, 실제로 노련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노련함은 테크닉, 즉 기술의문제이며 기술은 대개 연습량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다 싶은 관계는 확실하게 거절하고 감당할 만한 관계는 기꺼이 책임을 지는 연습. 그렇게 단련하다 보면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멋진 어른, 아니 호구마가 되고 싶다.
어쨌거나 오늘도 맹연습이다.
본업은 편집자, 부캐는 솜숨씀으로 일명 '호구마'(호박도 고구마도 아닌, 착하지도 않고 못되지도 않은 어정쩡한 성격의 소유자) 같은 사람들이 겪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나라는 사람의 일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담은 에세이를 출간하였습니다. 관심과 사랑은 대환영입니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영풍문고 등 온오프라인에서 주문 및 구매 가능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