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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K Apr 07. 2017

삶의 철학 18- 나는 정말 불행한가?

불행과 불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통한 내 삶의 주체가 되는 지혜

이 글은 제가 소속된 한  카페 회원인 어떤 분이 자신이 유학 중에 겪었던 인생을 송두리 째 바꾼 불행했던 인연을 떠올리며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는가?"라며 던진 화두에 제가 긴 시간 고민을 통해 정리하여 답했던 내용입니다.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분들이 있을 듯하여 이곳에 공유합니다. 




님의 오랜 고민을 잘 읽었습니다. 저의 철학적 사고는 항상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지혜를 얻는 측면에서, 삶을 보다 가치롭게 만드는 목적을 위하여 이루어집니다.  부족하지만 긍정적으로  글을 읽어주세요

제가 이해한바 님의 고민은 

" 삶의 실존에서 직. 간접적으로 겪게 되는 불편부당하고 불운한 일들이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모두에게가 아닌 어떤 특정인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 그런 일들을 모두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적합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신 것이라 봅니다.


이를 위해 사람에 대한 관점을 먼저 정의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사람은 자연계의 원리에 종속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살아갑니다. 


먼저 자연계에 종속적이란 것을 설명하는 가장 보편타당한 것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이 죽음은 매우 공평하고 보편타당해서 행. 불행을 따질 수 없습니다.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은 아마도 님의 불운, 불편부당에 해당하지 않죠

그러나 죽음의 평등을 인정하셨어도 님은 다시 다음 질문을 하실 것 같네요.

그런데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어떤 이는 잘못이 없는데도 나쁜 일을 겪어서 죽는 것은 왜 그런 거냐고?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 것은 왜 그런 것인가? 이건 뭔가 사전에 결정된 자연의 원리(종교인들의 신의 섭리나 뜻)에 의한 것이거나.. 그냥 운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요?라고.

저는 운명 결정론도, 행.불운도 저마다 다른 삶을 겪게 됨의 근본 원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출생 시점부터 결정된 성별, 부모가 물려준 유전인자, 태어난 나라는 내가 무엇인가를 자각하는 자의식이 생기기도 전에 결정된 것이므로 그것을 논리로 따지고 후회해도 바꿀 수 없습니다.

즉, 나는 왜 남자로 태어난 걸까? 왜 가난하게 태어난 걸까? 이런 식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가지고 있는 것을 만족하지 못하는 불만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그냥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니 해석하려고 하고 거기에 어떠한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면 종국에는 사주팔자 수준의 논리에 사로잡히게 되므로 배제하겠습니다.

다만 님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우셨던 삶의 우연적 사건." 왜 누군가는 잘못이 없음에도 재수 없는 일을 겪게 되는가? 심지어는 억울한 죽음까지도 당하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선 진리를 찾는 철학적 밝힘과 연결된 실존적 문제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회관계적 원리까지 포함하여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어떤 일을 겪는 것은 그 사람과 연관된 다음 몇 가지 조건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첫째, 그것은 선택입니다.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가습기 살균제 살인 사건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1) 죽음에 이르는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기업의 의사결정권자의 선택
2) 생활 화학제품의 제조 판매를 감독 관리하는 정부 관료의 선택
3)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는 유통업체의 선택
4) 가습기 살균제를 구매한 구매자의 선택
5) 구매한 가습기 살균제 구매자가 매일 살균제를 빈번하게 사용했던 선택
6)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면서 아이에게 과도하게 가깝게 두었던 선택

개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4> 번째 선택부터이고, 아이를 죽게 만든 것은 6) 번째까지의 선택의 반복 결과입니다.  하지만 1)번째부터 잘못 끼워진 첫단추가 2)번째에서 올바로 제거되었더라면 그 뒤 개인들이 선택을 아무리 반복했어도 가슴아픈 죽음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그러므로 이 사건은 운명의 행.불행이 아닌 사실 일련의 잘못된 선택 혹은 결정 과정이 만든 결과일 뿐입니다. 


만약 스스로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선택이 가져올 예기치 않은 행운도,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이 전혀 없는 삶은 삶이 아닌 이미 죽어버린 화석과 다름 아니겠지요


둘째, 그것은 임계치입니다.

자연계이든 인간계이든 어떠한 일이 결국 발생하는 것은 임계치에 도달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90도까지만 온도를 높인 물은 절대로 끓지 않습니다. 100도를 넘게 될 때 기화의 임계치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 임계치는 물론 이미 자연이 만들어 놓은 원리 안에서 존재하겠지만요. 사회의 임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적절한 구조적 문제의 임계치가 주어져야 합니다. 자연계와 달리 수많은 관계의 복합적 요소에 의하여 임계치가 만들어지므로 사전에 분석하기는 무척 어려울 뿐입니다.

황당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이가 이유 없이 싸움을 나에게 건다. 그러기 위해선 그 이가 싸움을 걸 수 있는 조건(조현병을 가졌다던가.. 그전에 누군가와 말다툼으로 무척 화가 났다던가 등)이 발현 되어야 합니다. 즉,  마음의 스트레스가 높아져서 참을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가게 될 때 싸움을 거는 일이 발생합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아이들을 죽게 만든 것은 살균제의 독성이 어른보다 훨씬 낮은 임계치를 가진 아이들에게는 힘에 겨웠던 것이 이유입니다. 만약 독성이 매우 적었고 살균제 사용 횟수도 적어서 그 누적량이 아이들의 신체가 견딜 수 있는 임계치에 현격하게 못 미쳤다면 죽음의 불운까지 결코 가지는 않았겠죠


셋째, 그것은  힘(의지)의 상호 역학적 관계입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보다 병마를 이겨낼 확률이 높습니다. 길거리에서 폭력배를 만나도 탁월한 운동신경과 단련된 근력, 그리고 평소 수련한 권법이나 무술 훈련을 겸비한 남자라면 그 폭력배를 만난 불운도 극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반대로 심성이 약하고 몸이 연약한 여자였다면 꼼짝없이 강도나 강간을 당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여자가 스스로 강도가 많은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기를 선택하고, 이미 술을 많이 먹는 선택을 했던 상황이라면 고양이 앞에 쥐 꼴이었겠죠)


그래서 악인은 항상 약자를 공격합니다. 맹수들도 성체보다 약한 새끼를 노려 사냥하듯이요. 그러므로  스스로 강해지거나 다른 약자들과 협력해둠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 위기를 대처할 힘을 갖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연약한 초식 동물은 항상 큰 무리를 지어 군집 생활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겠지요. 


님이 겪은 일은 마치 밤길에 강도를 만난 여자와 같이  미리 준비되지 않은 채 예상못한 한 악인을 만난 것이지만 미리 힘을 길러 대비해두었다면 그 악인은 공격할 시도조차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평소 악인과 선인을 가려서 사귀는 조심성,  위기에 부딪혀도 대항할 수 있는 강한 의지력,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지혜와 실행력,  문제를 함께 해결할 믿음직한 파트너의 지원 등이 수반되었더라면 결과는 역전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결국 내가 강력한 힘과 의지를 가질 때 문제는 때론 아무 문제가 안될 수 있습니다.

넷째, 그것은 확률입니다.

공대 출신이시라면 아시겠지만 물리학의 궁극인 양자역학도 결국 하나로 정의가 불가능한 불확정성(입자일 수도 파동일 수도 있는..)을 근본 원리로 채택하였으며, 남자의 고환에서 1번에 배출되는 정액 내 정자의 수가 1억~3억 마리나 되는 것도 미리 수정될 건강한 정자를 단일 정자로 확정했을 때 발생할 실패를 최소화하여 수정 성공" 확률"을 최대한 높이는 인체의 현명한 전략입니다. 수정된 정자는 행운, 수정에 실패한 나머지 정자는 불행이 아니라 확률적 선택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물론 건강한 정자에게 확률이 높아지겠죠( 위의 세 번째에서 언급한 불행 혹 행운을 맞이한 당사자가 지닌 힘의 역학도 역시 반영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불운, 행운이라는 말보다는 확률적 결과란 말이 적합할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단순한 선택은 필연보다 우연의 과정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무얼 먹을까를 결정할 때 물론.. 자신의 주위에 없는 음식을 먹기는 불가능하지만.. 당장 주어진 조건 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철저하게 우연적 결정일뿐입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조건이 선택될 확률은 이 우연적 결정 내에서 선택 가능한 전체 모수의 규모로 판명되겠지요.. 산택할 메뉴의 전체가 3개라면 결국 특정 음식이 선택될 확률은 1/3일뿐입니다.  


취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1명을 모집하는데 경쟁자가 단 1명이라면 확률 100%겠지만.. 1,000명이 경쟁자라면 0.1%가 될 뿐입니다. 님이 취업에 실패한다는 것이 결코 불운한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취업하기 매우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일 뿐입니다. 

자 여기까지 입니다. 제 글에 얼마든 비판을 하셔도 좋습니다. 저의 해석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결코 인간의 자아는 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사전에 결정한 뜻에 의하여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연한 불운도 노력에 따라 바꿀 수도 있는 삶의 주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불행을 운명으로만 받아들이고 변화시키려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은 각자의 삶을 개척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평생 불운한 일들을 수십 번 겪었음에도 과감히 극복했던 인물들은 그렇게 자신의 운명의 주체가 되었던 위대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단지 주어지고 수용해야 할 것이 아닌 스스로의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 산 증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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