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난 10년간 거쳐간 스타트업 회사들이 도합 10 군데가 넘는다. 개중에는 학생들끼리 무일푼으로 패기 넘치게 시작한 회사들도 있었고 대기업의 사내 밴처 같은 개념으로 넉넉한 자본금을 가지고 시작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각각 장단점이 다 다르겠지만, 이 회사들을 가볍게 세 가지 카타고리로 분류하면 대학생 스타트업 / 경력자 스타트업 / 대기업+ 스타트업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나는 각 카타고리 별로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성장 가능성, 미래비전, 업무환경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대학생 스타트업
10년 전 대학생 무렵, 카카오톡이 세상에 출시된 지 얼마 안돼 한국 메시지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 덕분에 창업 열풍이 불면서 정부와 대학교에서도 각종 지원금을 주며 대학생 창업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구글에서 인턴을 했던 잘 나가는 지인이 함께 앱 하나 만들어보자고 손을 내밀어서 시작하게 된 나의 첫 스타트업 경험 기는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때 나는 회사가 굴러가려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구글 인턴 출신 3명이 함께하는 스타트업이라 당연히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앱 시장에서는 학력도, 경력도 상관없고 오로지 앱 재사용률(Retention rate)과 수익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ROI)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했다.
우리가 기획한 앱은 총 두 가지였었는데, 첫 번째 서비스는 나름 연세대학교 창업대회에서 우수상을 가져다주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실제로 지원금을 받고 출시를 하려고 준비하다 보니 허점들도 많고 기술적으로 한계도 많아 출시를 접고 새로운 앱을 준비하게 되었다. 두 번째 서비스는 구글 K 스타트업 프로그램의 세미파이널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심사위원들로부터 앱 기획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수익구조가 애매모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낙선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장의 흐름을 보지 못했고,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팀원들 간에 서로의 가치와 비전에 대한 공감과 공유가 부족했다.
대학생 스타트업을 하면서 느낀 장점은, 앱을 출시하기 위해 겪는 일련의 과정들은 인턴경험이나 전공 공부를 할 때는 몰랐던 기획, 영업, 회계, 마케팅 그리고 개발직군들의 업무들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인원이 많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1인 3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직군에 대한 경계도 모호해지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지만, 사회 초년생으로서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게 된다는 것은 아주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다 같은 대학생이다 보니 내가 한 작업물에 대해 적절한 피드백을 주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각자 분야도 다르고 같은 디자이너라도 서로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전혀 다른 의견이 쏟아지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의미 없는 디자인 수정만 반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대학생 창업은 경험해 봐서 나쁠 것은 없지만,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하기보단 그래도 이왕이면 이미 수익을 내고 있는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그들이 수익을 어떻게 창출하고 다가오는 위협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배우고 난 뒤에 스타트업 창업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대학생으로서 수많은 거대 공룡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시장에서 성공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기반이 있다면 다양한 실패를 경험해도 금방 일어날 수 있겠지만 경제적인 기반 없이 수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학업과 스타트업을 지속하는 데는 많은 인내심과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입사원으로 지원할 수 있는 나이 상한선은 정해져 있고, 창업을 하느라 보내온 시간은 경력으로 쳐주지 않기 때문에 성과가 없는 긴 시간을 버티는 과정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감당하기 쉽지 않다.
경력자 스타트업
학부시절 스타트업 실패를 여러 차례 겪고 난 뒤, 내가 부족한 부분들을 배우기 위해 이미 수익을 어느 정도 내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어떤 식으로 회사를 굴려가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 앱의 재방문율 상승을 위한 전략, 마케팅 전략 그리고 투자유치방법 등 그들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알고자 했다. 대부분의 수익창출 중인 스타트업들은 해당 업계의 잔뼈가 굵은 경력자 출신들이 많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풋내기 대학생들에 비해 업계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업계 내에서 아쉬웠던 부분에 대한 설루션을 제공해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같은 업계 출신들이 함께 의기투합하여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내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무언가가 필요할 때 업계 인맥을 통해 필요한 대상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또 학생들에 비해 초기 자금도 넉넉하게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조금 더 회사의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
내가 다닌 스타트업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두 곳인데, 한 곳은 정부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회사였고 다른 한 곳은 자신들만의 독보적인 기술을 가진 회사였다. 첫 번째 회사의 경우, 각 정부부처에서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구색에 맞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회사를 운영했었다. 따로 이렇다 할 아이템을 가지고 있진 않은 회사였지만, 다양한 전공의 명문대 박사 출신들로 이루어진 이 회사는 정부가 원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주관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을 잘 따올 수 있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많은 프로젝트들을 거쳐갔으며, 생각보다 모든 프로젝트들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나는 정부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을 경험할 수 있었으며, 월급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회사의 경우, 자신들만의 강력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는데 회사 구성원들 또한 해당 업계에서 굵직한 자리에서 계시다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의기투합하여 설립한 회사였다. 내가 들어가서 일했던 게 10년 전인데 그때도 투자자 유치를 받아 잘 성장하고 있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사가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경력자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이때 나는 회사에서 사진 촬영, 영상 촬영, 영상편집, 홍보기사 배포, 이메일 디자인, SNS 콘텐츠 디자인, 앱 디자인, 웹디자인, 박람회 디자인 등 정말 다양한 활동들을 했는데 디자이너가 두 명밖에 없기도 했고, 외주로 맞기기에는 회사 규모가 너무 작기도 했기 때문이었지만 덕분에 여러 분야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었다.
내가 다녔던 스타트업들은 좋은 점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내가 아쉬웠던 점은 회사 체계가 명확히 잡혀있지 않았던 점과, 언제 퇴근할지 모르는 살인적인 근무시간, 투자를 받아도 실적을 못 내면 언제 회사가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장 컸다. 사수를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만났던 사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살인적인 업무량에 허덕이느라 나에게 업무 피드백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대기업으로 들어가 업무 체계를 배우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대기업 + 스타트업
꽤 여러 곳의 밴처 회사를 거처 나는 한 대기업의 디자인 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200명 가까이 되는 사수 디자이너들 속에서 많은 피드백을 받으며 나의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대기업이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단가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실행할 수 있어서 좋았고, 빠르게 시장에 내 디자인이 풀린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스타트업처럼 내가 많은 의사결정을 가져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스타트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대규모 프로젝트들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우연히 캐나다에 신규 설립된 지사로 발령받는 기회를 받게 되었는데, 본사의 경력을 바탕으로 서구권 시장에 맞는 디자인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적당한 자유도와 함께 적당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쉽게 망하지 않는 게 보장되는 모기업의 큰 후원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지사의 디자인 프로세스들을 정립해 나갔다. 하지만 어느 정도 프로세스가 정립되고 나니 크리에이티브한 업무보단 본사에서 만든 디자인 가이드들을 캐나다 시장에 맞게 고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쉬웠고 결국 나는 다시 한번 캐나다 로컬 밴처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지금 회사는 대기업이 모기업인 밴처 회사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시장에서 살아남아 업계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회사이다. 나는 이 회사에서 브랜드 디자인, UIUX디자인, 광고디자인 등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높은 자유도와 함께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서 내가 여태껏 다녔던 스타트업들 중에 나에게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근 10년간 여러 회사들을 옮겨 다니면서 느낀 점은, 나는 한 회사의 대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대기업에서 자신에게 정해진 업무만 하면서 지내고 싶진 않았지만 대기업이 주는 경제적 안정은 가져가고 싶었다. 또한 빠르게 바뀌는 시장에 맞춰서 계속 나를 성장시키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는 대기업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스타트업이 가장 잘 맞는 회사였다.
글을 맺으며
어느덧 30대가 되고 보니 대학생 시절에 나와 같이 동거 동락하며 함께 스타트업을 했던 지인들 중 몇 명이 뉴스 기사에 스타트업 대표로 나오는 것을 가끔씩 접하게 된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스타트업 활동을 이어나갔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겪을 때마다 느꼈던 힘든 감정들을 생각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학생 때만 해도 패기 넘치게 서로를 공동대표라고 부르며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표라는 말 뒤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책임의 무게를 알게 된 후 우리는 대부분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로 돌아온 친구들의 뉴스 기사가 더 장엄하게 느껴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