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오퍼를 받고 다시 원래 회사로 돌아온 지 어느덧 4개월이 조금 넘었다. 회사 사람들한테 이직한다고 작별인사 겸 단체 이메일을 돌리고 미팅을 잡아서 친한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근 3주 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인사하고 회사로 돌아가려니 정말 민망했다. 혹시 뒷말이 나올까 걱정과 고민이 참 많았지만 막상 돌아와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직장 복귀를 축하해 주었고, 너 없이 일하려니 정말 막막했다고 다시 같이 일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말해주었다.
새직장 vs 현 직장
지금이야 편안한 마음으로 타이프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수많은 고민을 했다. 새로운 회사는 유명한 E커머스 회사 중 하나였고 그 회사의 프로덕 디자이너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커리어 전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만 가족 없이 타국에서 남편과 나 단둘이 어린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금융업에서 커머스 회사로의 업계 전환과 함께 웹/그래픽 디자이너에서 프로덕 디자이너로의 커리어 전환에 필요한 시간적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한계를 감당할 수 있을지 많은 걱정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하지만 성취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기회가 많았기에 가족과 나의 욕심 사이에서 한참을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해맑게 웃으면서 "엄마 같이 놀자아~"하고 내 다리를 끌어안으며 애교 부리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육아휴직 후 곧바로 일터로 복귀했던 시절 쉴 틈 없이 바빴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18개월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화장품 회사에서 금융업계로 이직을 하면서 6개월의 프로 베이션 기간 동안 남편이 퇴근 후 육아와 가사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때 남편도 나도 정말 지처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이에게 진심을 다해 함께 놀아주기보다는 정해진 할 일 목록의 체크마크를 한시바삐 채워나가는 느낌으로 시간에 치여 놀아주는 느낌이 강했다. 그로 인한 죄책감도 컸고 내가 지금 사랑하는 아이를 두고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도 컸었다. 다행히도 프로 베이션 기간이 끝나갈수록 회사 업무도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점차 워크 라이프 발란스를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간을 다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심지어 이번엔 직무도, 업계도 다른 곳이기 때문에 배워야 할 것들 투성이었고 기회만 보고 덤비기엔 다른 장벽들이 너무 많았다. 긴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내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이번에는 아이와의 즐거운 놀이시간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간 이유
사실 가족 말고도 내가 이직을 준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의 여파로 많은 IT회사들이 저마다 인재들을 모셔가기 위해 수많은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 팀을 포함한 회사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기 시작하면서 회사 내에 인력 공백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던 것은 디자인 헤드를 비롯한 팀의 중추 역할을 하는 윗 직급 상사들의 이직이 가장 컸다. 그들의 공백으로 디자인팀 전체가 한동안 방향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기약 없는 공백과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엄습했다.
그들이 비운 자리를 대신해 내가 직접 스테익 홀더들과 미팅을 주도하며 프로젝트를 리드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책임감도 막중했고, 프로젝트가 어그러질까 걱정도 불안도 컸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하나둘씩 프로젝트들이 성공적으로 론칭을 하게 되면서 회사 내에서 나의 입지가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디자인 팀에서 하는 업무 중 상당부문의 프로젝트들이 다 내 손을 거쳐가게 되었다. 연봉은 그대로인데 하는 일은 갑자기 범람하다 보니 회사에 대한 불만도 조금씩 쌓여가기 시작할 찰나에 때마침 이직 제안이 오면서 나의 마음은 더욱더 흔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힘들게 프로젝트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덕분에, 원래 직장 대비 일반적인 연봉 테이블을 훨씬 벗어난 이직 오퍼였음에도 c레벨 컨펌까지 받으며 연봉 인상과 함께 다양한 옵션들을 포함한 카운터 오퍼를 제공해 주었다.
여러 회사들을 거쳐가며 항상 이직으로 승진과 연봉 인상을 획득해 왔던 과거와 달리 처음으로 한 직장에서 제대로 된 협상을 해보았다. 저 연차 시절만 해도 2-3년에 연봉협상을 할만한 업무강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큼의 권한이 있지 않다 보니 이직이 유일한 연봉 상승의 통로였지만 연차가 높아질수록 권한이 생기면서 제대로 된 연봉협상을 할 수 있는 위치로 변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나도 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치까지 가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업무능력, 인사관리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