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 쓰다
그토록 모호하고 먼 일 같았던 명경지수 오픈 일이 다가왔고, 3월 22일 토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했다. 누워 허리를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며 어두운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오늘이 왔네… 늘 결정적인 순간은 아무 특별할 것 없이 도착한다. 산수유꽃, 매화꽃, 수선화, 목련이 두둥실 떠오른 꽃바람 솔솔 부는 봄의 초입, 명경지수도 고요히 꽃을 피웠다.
오픈하기도 전에 예약을 한 손님들이 있었다. 첫날, 첫 아침 손님을 맞이하기 전 얼마나 떨리고 설레던지. 사전에 연습한 대로 손님을 맞이했지만 얼마나 뻣뻣하고 뚝딱거렸는지. 돌이키지 않아도 선명한 우리 모습에 쿡쿡 웃음이 난다. 손님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현우는 미어캣이 되어 가림천 틈 사이로 손님들을 연신 기웃거리고, 나는 너무 수줍고 낯설고 부끄럽고 그래서 벽 뒤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일기를 쓰고 노트를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만 머물렀던 이 공간에 타인이 들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각자의 기억 그리고 함께 경험한 기억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유무형의 것들을 모아 모아 엮어낸 명경지수. 명경지수의 특수한 시공간을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무엇을 느끼고 가져가게 될까? 내가 조용히 꺼내놓은 빛나는 구슬 조각이 명경지수에 온 분들께 잘 전달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긴장된 채 살았다 보니 대학교에 들어와도 관성 탓에 긴장이 잘 풀리지 않았다. 서울의 집을 떠나 포항의 학교 기숙사에서 낯선 사람들과 살아가는 건 내향적인 내게 다소 버거운 일이었다. 유일하게 쉴 곳은 화요일마다 가는 카페였는데 그 카페의 정체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밀로 했다. 그곳에서만큼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온전히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없는 타지에서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뿐이었다. 어떻게든 숨을 쉬며 살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그 카페에서 혼자 머무르는 동안 나는 깊은 편안함을 느꼈다. 일기는 9살 때부터 줄곧 써왔지만 나와 나누는 필담은 그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한 입 한 입 아껴 먹으면서 일기를 쓰고 책을 읽다 보면 3~4시간이 지나있었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약 3시간 분량이라 들었던 음악이 다시 흘러나오면 그제야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그 카페에서 머물렀던 1년 반 동안 나도 모르게 책과 커피와 빵이 있는 따뜻하고 고요한 공간을 꾸리고 싶다는 꿈이 싹 틔웠다. 물론 자영업자로서 건강하게 기능하지 못할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꿈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돌보지는 않았지만.
10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살며 이런저런 공간을 다녔다. 어떤 공간은 한 시절 동안 자주 들락거렸고 그 공간이 문을 닫으면 내 시절도 닫히는 듯했다. 나의 삶에 대해 돌이켜보면 한 공간이 한 덩어리 삶의 중심에 있었다. 서울에 살았던 시절에는 그 카페, 포항에 살았던 시절에는 그 카페와 그 책방이. 그곳에서 나와 필담을 나누며 다독이기도 하고, 생각을 돌이키기도 하고, 뒤통수를 턱 맞기도 하고, 여러 감정에 휘몰아치다가 일기장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돌덩이 같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 덜어내는 일은 어떤 공간들에서만 가능했고, 그 공간들은 공통적으로 책과 향긋한 먹을거리가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기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그런 공간들.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그토록 많은 카페와 책방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공간이 열 곳도 되지 않는 걸 보면 '혼자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공간을 운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누군지 모를 대중을 위한 노트 말고, 내가 정말로 가지고 싶은 노트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많이 공부하고 연습해서 1년 동안 새 수제 노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노트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보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물건을 사는 방법은 어떤 공간에서 물건을 충분히 만지고 써보고 이리저리 살펴본 뒤 이건 내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구입하는 식이다. 그런 내가 물건을 판매한다면 역시 같은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일기를 써온 사람이 만족스럽게 일기를 쓰기 위해 만든 일기장이니, 손님들도 이 노트를 일기 쓰는 데 사용했으면 했다. 그래서 일기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고 그 결과가 명경지수이다. 2023년 10월, 네 글자 이름으로 만난 명경지수가 이렇게 어엿한 공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워낙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일반적인 카페처럼 운영하다가는 오래 가지 못할 걸 알았기 때문에, 내가 일기장 지기로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탐구했다. 일본과 한국의 수십 개의 고요한 공간들을 찾아 머물러보면서 어떤 방식으로 공간을 운영하면 좋을지 긴 시간 동안 고민하고 시스템을 만들고 미세하게 수정하길 반복했다. 명경지수의 운영방식은 범주가 모호하다. 요가원 같기도 하고, 카페이기도 하고, 영화관 같기도 하고, 목욕탕 같기도 하고… 어떤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아서 우리는 '일기장'이라는 새 범주를 만들었다. 운동을 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운동장. 마찬가지로 일기를 쓰는 장소로서 '일기장'이다. 물론 일기만 써야 하는 공간은 아니다. 혼자 책상에 앉아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이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뜨개질을 할 수도 있고, 수를 놓을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복잡한 업무를 단순하게 정리할 수도 있고, 편지를 쓸 수도 있고, 나처럼 노트를 만들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며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 단, 디지털 기기(핸드폰이나 노트북) 사용을 하지 않기를 권하는 공간이다. 강요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평소와는 다른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장치를 마련했다. 잘 때도 머리맡에 둬야 하는 스마트폰을 멈추게 하는 공간이라니. 일기장 지기로서도 이 장치를 제안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이 쉽게 앗아가는 마음의 고요는 스마트폰을 멈춘 채 얼마간 존재하면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사람들이 직접 경험해 보았으면 했다.
명경지수 오픈 첫 주 동안 손님들과 주변 이웃 가게 사장님들께 백설기를 드리며 인사를 나눴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 부끄럽기도 했지만 모두들 친절하고 상냥하게 반가워해주셔서 뿌듯하고 감사했다. 많은 손님들이 오시지 않았지만 너무나 반갑고 소중한 사람들이 기꺼이 오픈 주간에 방문해 주었다. 너무 수고했다고, 우리를 꼭 닮은 공간이라며 다정하고 달콤하고 배부른 말로 우리를 꼭 안아주었다. 처음 만난 손님들은 오래 만난 친구처럼 우리를 바라보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띵- 알람 소리가 울려 마주한 공간 후기는 그저 감동이었다. '♥어머 어머 뭐야♥' 하며 우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방방 뛰었다.
예약 손님이 아무도 없는 썰렁한 화요일, 현우와 나는 첫술에 배부르지 말자,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노트를 만들고, 한 주를 돌아보고, 조여야 할 부분과 느슨하게 할 부분을 점검한다. 저녁으로 단골가게의 뜨끈한 만둣국을 먹으면서 '오픈하니까 재밌다, 그지' 하고 즐겁게 후루룩 국물까지 든든히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