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본가에 다녀오며, 아들과 제법 묵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아들들이 그렇듯) 어떤 말을 해도 잘 가닿지 않거나 쉬이 돼 튕겨 나오던 옛날과 달리, 어른이 된 아들은 나의 언어를 고이 받아 주었다. 아들도 딸처럼 말했다. 이젠 엄마 인생을 살아. 엄만 그럴 자격이 있어. 나는 운전을 하고, 아들은 흐르는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둔 채 짧지만 밀도 높은 대화를 그렇게 주고받은 후 아들은 밴드 합주 연습하러, 나는 나의 인생영화를 다시 보러 신촌 '필름포럼'을 향했다. 이보다 더한 농밀함은 없었다, 아들과 내가 함께 한 순간에.
서칭
재개봉 : 2023.10.11.
개봉 : 2012.10.11.
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다큐멘터리
국가 : 스웨덴, 영국
러닝 타임 : 86분
배급 판씨네마㈜;
줄거리 : 미국에선 ZERO, 남아공에선 HERO?! 팝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가수, ‘슈가맨’의 놀라운 이야기! * 본고장 미국: 음반 판매 6장,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운의 가수! * 반대편 남아공: 밀리언셀러 히트가수, ‘엘비스’보다 유명한 슈퍼스타! 70년대 초, 우연히 남아공으로 흘러 들어온 ‘슈가맨’의 앨범은 지난 수십 년간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히트를 기록한다. 하지만 ‘슈가맨’은 단 두 장의 앨범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신비의 가수! 전설의 ‘슈가맨’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두 명의 열성 팬이 진실을 밝히고자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단서라고는 오직 그의 노래 가사뿐! 기발한 추적 끝에 ‘슈가맨’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 네이버 영화 소개-
2012년 10월 11일 개봉했던 '서칭 포 슈가맨'은 미국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가수였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슈퍼스타가 된 가수 식스토 로드리게즈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미국에선 ZERO, 남아공에선 HERO'라는 글귀에서 극적인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실존 인물의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을 통해 예술과 삶, 그것을 관통하는 '진심'에 관해 사유하게 하는 다큐 음악 영화다.
(예능 프로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은 이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다.)
내 삶의 키워드 중 하나로 '숭고함'을 제일로 꼽는다면 그것은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와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영향이다. 숭고함은 종교나 정신, 봉사 혹은 희생의 영역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평범한 일상의 태도에서도 연마될 수 있고 구현될 수 있음을, 픽션과 실재의 두 인물에게서 배웠다.
내 마음속의 영웅, 식스토 로드리게스. 위대하게 살진 못해도 숭고하게는 살 수 있다고 삶으로 보여준 사람. 소외된 중에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고매하게 살아간 사람, 능력에 걸맞은 자기 자리를 찾아낸 후에도 여전히 살아온 대로 살아간 사람. 낮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 고귀한 영혼과 그에 걸맞은 예술성을 지키며, 화려함을 쫓지 않고 소탈하게 살다 간 사람. 우아하고 숭고하게 살다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과 음악으로 오롯이 보여준 그는 올해 8월 8일 영면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엄마 살고 싶은 삶을 살라는 응원은 결국 엄마 자리를 찾아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엄마로, 아내로, 혹은 며느리로서의 삶을 정착할 만한 '내 자리'라고 생각한 적이 실은 없다. 내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묵묵히 지나가야 할 길로 여기지 않았나 싶다. 그 길을 다 걸으면 나에게 꼭 맞춤한 자리를 찾아내거나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대개는 읽거나 쓰고, 학습하고 탐구하며 그 시간을 지나왔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것은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나는 나에게 제일 많이 집중할 수 있었고, 꽤 많은 시간을 나를 위해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자리'라는 것은 모호하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자괴감은 종종 마음을 짓누른다. 성공하고 싶거나 주목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질적인 계산은 원래부터 없는 편이다. 그저 내가 내 자리를 알아보고, 그곳에 안정감 있게 자리 잡는 일. 그것은 쉬운 듯 어렵고 가까운 듯 먼 일이 되어 저으기 나를 애달프게 한다.
조급한 수를 부려본다 해도 별반 달라질 게 없음을 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이미 늦었다면, 늦게 가면 되는 것을. 동동거리느라 앞뒤로 우왕좌왕, 오히려 제자리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걸음을 더 늦게 만든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나에 대한 확신, 어쩌면 아들과의 대화에서도 그것을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을 통해 나를 인정하려는 마음. 주변인을 통해 확인받으려는 마음. 여전히 나는 그렇게 '나'를 소외시키고 있었구나.
여러 해 지나 다시 본 나의 인생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은 나의 그런 얕고 삿된 마음을 다시금 조율해 주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으로 얼마든지 괜찮은 삶을 살아낼 수 있다. 평범함 속에 숭고함과 우아함을 연마하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든지 욕심내도 좋을, 욕심내도 괜찮을 삶이다. 그런 태도라면, 어디에 있어도 다 '내 자리', 내게 맞춤한 자리다.
이 좋은 영화를 오십이 석 중 세 자리만 채운 채 상영했다는 것은 이번 달 들어 제일 슬픈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좋은 영화를 상영일 얼마 안 남았지만, 조심스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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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포럼 : 서대문구 성산로 527 하늬솔빌딩 A동 B1
*이후 상영시간 : 11월 16일(12:00), 18일(16:00), 20일(10:10), 22일(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