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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Nov 11. 2024

어쩌다 엄마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지 그리 오래지 않다. 딸 아들이 사회에 무해한 보통의 어른으로 자란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런 엄마 노릇이라도 하느라 애썼다고 조금은 다독일 수 있었다. 밥을 잘해주고, 살림 잘 살피고, 성적 관리 잘해주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거의) 하지 않았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아예) 긁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 덕에 우리 집은 대개는 평화로웠다.


내보기엔 언제나 나보다 아이들이 나았다. 애들만 할 때의 나를 돌아보면 늘 아이들보다 어설펐고, 게을렀고, 거짓말도 곧잘 했다. 자율학습을 수시로 빼먹고, 독서실비 받아 공부 안 하고 딴짓하고, 뭐 그런 것들. 딸 아들을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옛날과 비교하며 키운 일은 잘한 일 같다.



      

엄마라는 정체성이 확 꽂히던 순간을 기억한다. 대개는 나도 내가 엄마 같지 않았다. 학원에서 퇴근해 돌아오며 몹시 피곤했던 어느 저녁, 그날따라 이상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기 싫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아이가 묻는다.

“엄마야.”

“엄마야?

“응, 엄마야~”

“와, 엄마다, 누나! 엄마 왔어!”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 그때만 해도 어렸으니 오후 내내 엄마를 기다렸겠지.

‘엄마야’라고 말하는 순간 목구멍이 잠시 뜨거워졌다.

아, 엄마구나, 내가 엄마였어. 아이들이 애달프게 기다리던 엄마. 승윤이 예준이 엄마.  

    

내가 나를 ‘엄마’라 칭하던 그 순간의 뜨거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좋건 나쁘건, 잘하건 못하건, ‘나도 엄마’라는 깨달음이 갓 삶은 흰 달걀처럼 마음에 온기를 주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라는 정체성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이른 나이의 결혼과 이른 출산으로 그에 걸맞은 내면을 미처 갖추지 못한 미성숙한 엄마. 변화를 거부하고, 책임을 면하려는 모자란 엄마 역할에 안주하고 싶었던 건지도.  




엉성한 엄마지만 무심하진 않았고, 필요한 모든 순간엔 늘 아이들 곁에 있었다. 남편과 역할을 나눌 이유도 없었다. 공부에는 샘을 내지 않았지만 노는 일에는 샘을 냈다. 남보다 잘 노는 가족이어야 했다. 학원 하며 벌던 돈은 모두 영화, 여행, 공연 등 노는 일로 소진했다. 그래서 지금 내 수중엔 돈이 없고, 아이들은 되게 똑똑한 어른으로 크지는 못했다. 그냥 적당한 어른, 내 생활지수가 낮았던 탓에 일찍부터 그 틈을 메우느라, 특히나 딸은 생활지수 대략 상위 3프로 안에 들 만큼 야무진 이십 대가 되었다. 한량하게 키운 덕에 (혹은 탓에?) 여느 집 아이들과 조금 다른 결이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잘나고 못나고가 아닌, 약간의 개성.


딸을 빼면 일상이 안 돌아가고 말할 거리가 떨어질 만큼 딸의 영역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딸은 엄마를 안 해도 돼서 좋고, 아들은 엄마일 수 있게 해 주어 좋다. 친구 같던 아이들은 어느새 언니 오빠 같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사는 엄마인지라 서로 편안하다. 노래와 영화, 책을 함께 공유하고, 회식하듯 이따금 만나 한 끼를 나눈다. 내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이따금 나를 칭찬해 줄 때 행복하다. 두고두고 뿌듯한 칭찬 하나는

“와. 엄마는 매일 술 먹는데 어떻게 늘 멀쩡해? 대단해, 진짜.”

계속 술 먹어도 좋다는 허락처럼 들린다.

  



딸은 나의 일상을 두루 잘 살피지만 시크하다. 아들은 무심하지만 이따금 다정해서 한 번씩 심금을 울린다. 외롭거든 아무리 늦은 밤이어도 꼭 전화하라는 아들의 당부는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따뜻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들을 어렵게 대하는 편이다. 마음을 열고 기대지도 않는다. 외롭고 쓸쓸한 정서에 익숙한 나는 아무리 외로워도 혼자 술을 마실 것이다. 아무리 취해도 혼자 쓰는 글 주사로 족할 것이고, 아이들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 깍쟁이같이 늙어갈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다방이라 불러도 좋을, 베트남 달랏(Dalat)의 찐 로컬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서울에 작업실은 괜히 구했다. 달랏이나 들락날락하며 살면 좋을 것을. 떠나와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하다. 족자카르타에서 팔십일을 머물 때엔, 늘 나를 괴롭히던 나쁜 꿈을 거의 꾸지 않았다. 괜스레 마음 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 아무러해도 되는 시간. 그런 마음으로 건너가려 여행을 떠나 오나 보다. 스물다섯에 결혼해 이십 대 같은 이십 대를 살지 못했는데, 경제적으로는 궁해도 마음은 자유로운 이십 대의 나날을 지금 살고 있다. 철없이 살게 두는 아이들이 고맙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를 잃지 않고 살게끔 협조해 준 남편도 감사하다.

     

아이들이 다 자라 어디든 쉬이 떠나올 수 있어 좋다. 딸 아들이 각자 안정된 가정을 꾸리면 (안 꾸려도 되고, 안정 아닌 모험을 해도 물론 좋다) 그때 나는 아주 긴 여행을 떠날 지도. 지난밤 사브리나 님이 들려준, 시리아가 제일 좋다던 그 여행 할머니처럼 살고 있다면 좋겠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딸 아들 집 초인종을 누르고, ‘누구세요?’ 물으면 ‘엄마야’라고 말하며, 아주 오랜만에 엄마 정체성을 느낄, 그날을 그려본다.

그때도 여전히 철이 없으면 좋겠다. 혼술 후 글로 주사를 지껄이는 ‘쓰는’ 할머니였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멈춤 없이 써야 한다. 이야기가 많은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께도 이야기가 많지요. 이야기가 많은 삶을 살고,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꾼이 되기로 해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이야기이며 글.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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