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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아 Jan 31. 2022

들어가며. 외할아버지의 황해도 만둣국

2021년 8월 즈음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작업 공간을 얻게 되었다. 서울 동네 답지 않은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고 정겹게 느껴졌다. 이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이곳이 평범한 마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산 아래 해방촌 전경. 왼편으로 우뚝 솓은 해방교회가 해방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호랑이연고 냄새가 나던 방 안에서 손녀딸을 항상 무릎에 앉혀 주시곤 했다. 초등학생 4학년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외할아버지는 눈만 감으면 눈앞에 환한 계단이 보인다고 하셨다. 나는 외할머니의 권유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옆 방에서 흐느끼던 엄마와 삼촌, 이모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나는 혼자 외할아버지와 작별을 고했다.


'외할아버지 사랑해요. 이제 천국에서 편안히 쉬세요.'

초등학교 증명사진을 꺼내보았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셨다. 1950년 1•4후퇴 때 어머니와 가족 친지들을 두고 월남하셨다 한다. 외할아버지는 당시 낮에는 땅에 구멍을 파서 숨어있다가 캄캄한 밤 북한 인민군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한다. 함께 내려오시던 고모 할머니께서는 대변을 보면서 뛰어내려오셨다고 하니 얼마나 당시상황이 급박했을지 와닿는다. 어쩌면 외할아버지의 심장병은 아마 그때 생사를 오갔던 경험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황해도 축구선구 도대표로 활동하시다가 이후 해주의전에 들어가 의대생이셨던 외할아버지는, 1953년 6.25 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셨다. 타향에서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고 미군부대 발전소에서 일하시며 전혀 다른 삶을 사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엄마와 삼촌, 이모들은 1960년 대한민국 1인당 연소득이 150불 수준이었던 시절에도 햄과 빵, 버터와 초콜릿 같은 '미제'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자랐다고 했다. 지금도 엄마가 밥보다 빵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그 어렸을 적 성장배경 때문일 것 같다.

6.25전쟁 당시 미군에게 몰려든 아이들의 모습. 아이들에게 '쪼꼬렛(초콜릿)'이나 캬라멜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 출처 : 브런치 [밀리터리박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덧 초등학생 자녀가 있어도 무색할 나이가 되었다. 제사를 드리지 않는 터에 가족 친지들은  모여도 특별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지만, 매년 명절때마다 나의 뿌리가 저 북녘 땅 황해도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황해도식 만둣국이다.

올해 설날에도 어김없이 빚은 만두.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설날 대한민국에서 떡국을 먹는 것이 흔한 풍경이지만 우리 외가 식구들은 항상 만둣국을 먹었다. 우리 집에서 만나는 황해도식 만두의 특징은, 일단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삼촌들은 그런 만두를 10개씩 먹곤 했다. 5명의 자녀를 두시고도 명절마다 만두를 기본 몇 백개씩 뚝딱 만들던 외할머니. 어릴 적 그 옆에 앉아 조막손으로 만두를 빚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께서는 만두를 이쁘게 빚으면 딸을 이쁘게 낳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터지지 않는 것은 기본, 만두 모양내기에 진심인 편이다.


황해도 만두의 두 번째 특징은, 고기보다 채소가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가난으로 인해 고기를 구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배경과 황해도의 지역적 특색을 반영한다. 황해도 만두는 숙주나물이나 김치가 많이 들어가 느끼하지 않고 깔끔한 맛이 난다.


한국의 만두는 북부 지방에서 발전되었는데 그 이유가, 추운 지역은 메밀과 밀이 잘 자라는 반면 떡국의 재료가 되는 쌀농사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성을 포함한 이북 지역에서는 만두가 보편적인 명절 음식이다. 지역마다 생김새나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른 것이 흥미롭다.

황해도식 만두 속을 공개합니다! 김치와 당근, 버섯과 숙주나물 등 야채가 듬뿍 들어가고 고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매년 만두를 먹고 자란 손녀가 어느덧 서른여섯 살을 맞이하는 2022년 1월 31일. 가물가물한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다시 선명히 보고 싶어진 것은 바로 이곳, 해방촌에서였다. 해방촌에 숨겨진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를 보물처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이제야 외할아버지의 짧은 생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대한민국 평범한 한 가정이 가진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다음 세대를 향한 열정으로 써 내려가는 [해방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건국 이야기]. 이 글을 통해 해방촌에서 발견한 보석과 같은 대한민국 정체성이 기억되길 바라며. 특별히 대한민국 통일시대를 열어갈 다음 세대들의 삶의 방향성을 발견하는 귀한 밀알 되길 소망해본다.

서울 한복판 구름사이로 북녘 땅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 출처 : 미상


[해방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건국 이야기] 매거진 소개.


해방촌에 공간을 얻고 이곳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건국 스토리를 소개하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 6.25 전쟁, 산업화 시절을 통과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탄생 스토리를 한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해방촌 지역사회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다가올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다음 세대에게 귀한 나침판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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