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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Jun 28. 2021

프러포즈하지 말걸

남편과 결혼하는 건 나에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당시 이미 8년 넘게 만났고,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대학생 때부터 결혼 이야기를 했으니 사실 날만 잡으면 그만이었다. 양가 부모님도 결혼에 긍정적이셨고 걸림돌이 될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사회 초년생인 나도, 남편도 돈이 별로 없었지만 원룸에 월세로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어서 결혼은 물 흐르듯 진행되기 시작했다. 합의한(?) 결혼이라 청혼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형식적이라고 하더라도 프러포즈는 받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이 남자는 도무지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제 하냐고 물어보기엔 뭔가 자존심이 상해서 기다리다가 결국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급하게 현수막을 주문 제작하고 건전지 초와 풍선을 샀다. 준비하는 데 채 이틀이 걸리지 않는 프러포즈를 대체 왜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남편이 늦게 퇴근하는 날을 골랐다. 신혼집(이었던 남편의 자취방)에 몰래 가서 프러포즈하는 계획이었다.  


6시 땡 하자마자 퇴근해서 남편이 미리 나에게 준 열쇠로 신혼집에 들어갔다. 이삿짐을 날라 주러 한 번 오긴 했지만 혼자 빈 집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낯선 기분을 떨쳐내며 현수막을 걸었다. 내 프러포즈를 거절할 리 없기에 설레거나 떨리는 마음은 없었다. 사이트에 가입할 때 개인정보 동의 체크를 하는 것 같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기분만 내자는 거지.’ 풍선을 불고 전기 초를 켰다. 카톡으로 남편과 자연스레 대화를 하면서 도착할 시간을 가늠했다.


철컥, 하고  소리가 들리자 준비해놨던 꽃다발을 들었다. “짜잔! 나랑 결혼해줄래?” 예상과는 다르게 남편의 반응은 놀람이나 기쁨이 아닌 안도였다. “나는 내가 홀린  알고….” 엉겁결에 꽃다발을 받아  남편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이었다. “나는 옆집에서 굿을 하는  알았어.  우리  앞까지 초를 켜놨나 했지. 근데  안쪽에도 촛불이 어른거리는 거야. 미끼를 물어버린 건가.” 신혼집은 현관문을 열면 조금 복도가 나오다 현관문이  하나 나오는 구조였는데, 철문에 불투명한 유리가 붙어있는 옛날식 문이라 안쪽의 전기 촛불이 비쳐 보인 것이다. 영화 <곡성>   얼마 되지 않았던 남편은 나를 발견하기까지 공포영화에 홀린  같은 느낌이었다고.


“그러니까 왜 프러포즈를 안 해!” 자초지종을 듣고 한참 웃은 뒤에는 남편을 나무랐다. “사실 준비하고 있는데 좀 오래 걸려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랬냐는 말에 한 달 후면 결혼식이라고 다시 짚어줬다. ‘꼭 남자가 프러포즈할 필요는 없지!’라는 생각의 저변에는 ‘당신이 으레 해야 할 걸 하지 않아서 내가 한다 으이구’가 숨어있었다. 예정된 결혼식이었지만 홧김에 한 프러포즈였기에 재미도 감동도 없었다. 아니 영화 <곡성>이 떠올랐으니 재미는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얼마 후 퇴근한 나를 굳이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남편의 말에 모르는 척 차에 탔다. ‘프러포즈를 하겠구먼.’ 남편은 어색한지 괜히 이런저런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다가 “라디오 들을래?” 하고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켰다. 스피커에서는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사연은 아주 오래 전에 온 편지입니다. 광주 청년이라는 아이디를 쓰시는 분인데요.” 라디오 DJ가 된 남편은 능청스럽게 자기가 보낸 사연을 읽고 신청곡도 틀었다. 단 한 명의 청취자를 위한 라디오 방송이었다. 가만가만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지난 7년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집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마지막 사연이 나왔고, 마지막 신청곡은 남편이 직접 불렀다.


남편의 청혼에 꽃다발과 선물을 받아 들고는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마움과 뭉클함을 넘어 후회가 밀려왔다. ‘이걸 준비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내가 프러포즈를 조금 참을걸….’ 기다렸다면 조금 더 감동이었을 텐데 괜히 내가 프러포즈를 먼저 해서 김을 새게 만든 것 같았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에 ‘그러니까 일찍 하면 좀 좋아?’라며 속으로 애먼 남편 탓을 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하던데. 8년을 만났는데도 타이밍을 못 맞춰 프러포즈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결혼했다. 이 정도 어긋나는 타이밍은 감안해야 결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결혼을 앞둔 커플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이미 결혼식 날짜까지 다 정해졌더라도 프러포즈하기를. 한다면 너무 늦지 않게, 스튜디오 촬영을 위해 한껏 꾸민 날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프러포즈 하기를(그 정도 날짜면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프러포즈 안 한다고 홧김에 대충 준비해서 아쉬움을 남기지 말기를. 그 모든 게 어긋나더라도 결혼해서 행복할 수 있으니 마음 상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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