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포 Oct 13. 2021

크로아티아에서 만난 내 영혼의 소고기뭇국

연애할 때도, 결혼 후에도 음식 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다. 남편도 나도 뭐든  가리지 않고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혼여행 짐을   한국 음식을 얼마나 가져가야 하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지에 가면 현지식을 먹어야지.' 이상한 자부심, 먹부심이었다. 우리는 커다란 캐리어에 고작 컵라면 작은   개를 제외하고는 햇반도, 고추장도,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 먹을 한식, 어디 오지에 가는 것도 아니고 크로아티아에 가는데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먹지만 먹는  무척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서 신혼여행의 호텔을 예약할  조식이 맛있는 곳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렇다고 조식이  특별하진 않았다. , 시리얼, 우유, 커피, 계란, 소시지, 베이컨, 과일  예상하는 호텔 조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식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스테이크, , 파스타, 샐러드, 스테이크, 다시 파스타, 가끔 생선구이, 구운 채소.... 양식이 물리는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아무리 소금을  넣어달라고 요청해도 크로아티아의 음식은 지독하게 짰다. 결국 넷째 날에는 태국 음식점에서 팟타이를 먹으며 채워지지 않는 묘한 허기를 달랬다.


슬슬 컵라면을 먹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때는 여행 4일째였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돌아온 날, 호텔 발코니에서 노을을 보며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크로아티아의 바다컵라면의 콜라보는 환상적이었다. 아쉬웠던 게 하나 있다면, 컵라면이 너무 작았다. 햇반이라도 가져와서 밥을 말아먹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한식을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언제 다시 크로아티아에 오겠어?" 다음날에도 우리는 아시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고, 트립어드바이저를 검색해 가장 평이 좋은 스테이크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식이 다양하지 않은 나라라서 그런지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되어갔다. 남편과 나는 거의 매일 숙소를 옮기고, 하루에 직진 300km 운전하며 크로아티아를 종단하다시피 여러 지역을 다니며 먹었다. 그런데 마지막 여행지인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정말로  먹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고기, 파스타, 샐러드일 테니까. 하지만 크로아티아에서 애매한 한식이나 일본 라면을 먹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먹부심이 발동해 한국에 돌아가기 하루 전날 저녁은 그냥 호텔 뷔페에서 먹기로 했다.


관광지라 그런지 호텔 뷔페에  여러 나라 음식이 있었지만 나는 익숙한 양식을 담아왔다. 맛없는  싫었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주저하지 않는 남편은 고기가 들어있는 허여멀건한 국과 안남미로 지은  분명한 밥을  왔다. "여보, 그건 뭐야?" "차이니즈 비프스튜(Chinese Beef Stew)라고 되어있던데?" ", 나는 싫어. 뭔가 이상할  같아."  우려와는 다르게 국물을 한입 떠먹은 남편의 눈은 동그래졌다. "여보! 여보! 이거 먹어봐!" "아냐. 나는 싫어." "먹어봐야 . 진짜 맛있다니까?"


남편이 너무 맛있어하길래 못 이기는 척 한입 먹었다. 아니 그런데 이 맛은?! 흡사 엄마가 해준 소고기뭇국이었다. 무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깊은 무의 맛이 났다. 사골국 같은 맛이 났던 것도 같다. 나는 홀린 듯 남편을 따라 차이니즈 비프스튜와 밥을 한가득 떠왔다. 먹부심은 온데간데없었다. 쌀밥에 고깃국. 영화의 흔한 클리셰처럼 우리의 소울푸드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곧 한국으로 떠날 거면서도 다음날 조식에 차이니즈 비프스튜가 없을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 호텔 조식의 같은 자리에 '내 영혼의 소고기뭇국'이 있었다. 아마 조금 더 크로아티아에 머물렀다면 내내 호텔 식당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소고기뭇국은 급식으로 먹거나, 백반집에서 나오거나, 어쩌다 한 번씩 엄마가 해준 음식이었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을 정도로 평범한 식사. 하지만 크로아티아에 다녀온 후에는 이따금 소고기뭇국을 끓여 먹게 되었다. 그때랑 비슷한 맛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소고기뭇국이라고 부를 뿐, 크로아티아에서 먹었던 건 엄연히 차이니즈 비프스튜였으니까. 하지만 그 음식 이름이 뭐였든, 크로아티아에서 우연히 만나 밀가루와 고기로 니글거리던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 음식은 우리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감추고 싶었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게 하는, 익숙해진 타지를 다시 낯설게 만드는, 정말 내가 뭘 원했는지 떠오르게 하는 그런 음식.


써놓고 보니 소고기뭇국을 한번 먹을 때가 됐다. 최근에 재택근무를 한다고 빵을 밥 대신 때운 적이 많았다. 위도 장도 편하지 않다. 양지 국거리를 사고 무를 사야지. 거기에 마늘과 파만 있으면 끓이는 건 금방이다. 일단 내일 아침까지는 빵을 먹어야겠다. 소고기뭇국은 타지에서 고향이 그리운 것처럼 폼을 잡으며 먹는 게 제맛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환상과 분노, 연민의 나라, 이탈리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