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서울시청의 과장이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 과정은 실로 인간승리의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 하나는 뛰어나게 잘 했던 윤이었다. 공부로 인생을 바꾸어볼 수도 있었을까? 이른바 개천의 용이 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그러나 윤이 스무살 되던해 터진 한국전쟁은 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대구로 피나갔다 끌려간 군대 생활은 장장 4년 3개월간 이어졌다. 하루하루 제대만을 기다리며 버텨온 나날이었다. 겨우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찌어찌 장례는 치뤘으나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큰 일이었다.
우연히 서울시청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박봉이었다. 급여 조건이 좀 나은 남대문에 있는 모자 만드는 회사로 옮겼다. 그런데 당시 어렸던 막내동생이 아파 병원에 다니느라 자리를 좀 비웠더니 사장이 잔소리가 심해 비인간적이라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전쟁 직후였고 변변한 학벌이나 인맥이 없으니 직장을 구하기가 힘이 들었다.
마침 시청에 다니던 지인이 기회를 주어 다시 서울시청 관리과에 나가게 되었다. 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사람의 배려였다. 성실하게 일하다보니 관리과에서 도시계획과로 전근이 되었고 정규직이 되었다. 그러나 승진이 쉽지는 않았다. 내정자를 정해놓고 형식적인 시험을 치루기 일쑤였는데 마침 공개 경쟁으로 승진시험의 기회가 왔다. 열심히 준비한 윤은 도시계획과에서 유일하게 승진을 하였다. 구청으로 전근을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하였고, 동생들도 결혼을 했다.
1972년 또 한 번의 승진시험이 있었다. 동료와 함께 6개월간 여관에서 합숙을 하며 시험 준비를 했다. 어려운 시험이었지만(문제가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윤은 합격을 했다. 5급, 사무관급이 된 것이다. 서울시 사업소인 남부건설사업소에 발령이 나서 소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91년 종로구청에서 토목과장으로 퇴직할때까지, 20년간 윤은 ㅇ과장이었다.
윤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입지전적인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다. 이 밖에도 '학창시절 상장으로 벽을 도배했다'던가, '수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상급학교에 입학을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주로 이야기의 화자는 할머니 김여사였고, 너희들은 그당시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더 열과 성을 다해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만약에 과장 이상의 직급도 시험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면, 윤은 해낼 수 있었을 지 모른다고 김여사는 자랑하곤 했다. 충청도 고향의 일가친척들 사이에서 윤은 대단히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학교라고는 거의 다니지 않고 평생 농사일말고는 모르고 살아온 고향 사람들에게 공무원, 그것도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사무관급이라는 것은 엄청난 출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학교 동창들이나 친척들이 많이 찾아와 직장 청탁이나 각종 인생 상담을 해오곤 했다. 윤은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려 애썼지만 보증은 절대 서지 않았다. 주변에 보증을 서서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게 되었는데 다시한번 그 찢어지게 가난한 삶으로 가족들을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윤은 아이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집 가훈은'보증서지 말자!'라고 강조하기도 하여서 아이들은 그 뜻이 뭔지도 모를 때부터 보증은 서면 안되는 거라고 단단히 마음먹게 되었다.
김여사는 시험만 봤다하면 붙는 아들을 자랑했으나 윤은 내심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는 윤보다 공부를 훨씬 못했지만 서울대에 간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울대 졸업 후 좋은 직장에서 고위직으로 근무했다. 윤은 대학에 갈 형편도 안되었지만 앞날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집안에 윤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없었고 동기부여가 될만한 직장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재학중 해방이 되었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상황이었다.
윤은 그 당시를 돌이켜보며 주변에서 서울대학을 가라고 했거나, 사시든 행시든 고시를 보라고 조언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개천의 용이 되고 싶었으나 그 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학교 담임 선생이 윤의 성적이 아깝다며 상급학교 진학을 권하자 김여사는 거기 나오면 면서기는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면서기나 학교 선생 정도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출세였던 셈이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윤은 행정고시 출신으로 바로 5급으로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ㅇ과장은 15년이 넘게 일하고 40살이 넘은 나이에 힘겨운 승진 시험을 거쳐 5급이 되었고 이제 더이상 승진할 길은 요원한데, 처음부터 5급으로 시작을 하는 사람은 이후 국장은 물론이오 잘하면 부시장, 시장도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출발점부터 다른 사람들. 그것이 한이 되었던가 윤은 아이들 중의 한 명쯤은 (특히 아들)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 생활을 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승진을 한 1972년은 윤의 어머니 김여사의 회갑이었다.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와 행상부터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었으며, 남편을 일찍 여의고 다섯 아이들을 건사하며 당차게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윤이 세 딸을 낳고 떡두꺼비같은 첫 아들 용이를 본데다가 승진까지 하고 열린 회갑잔치여서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르 도와주신 윤의 외숙를 포함하여 집안사람들이 많이 모여 크게 잔치를 했다. 김여사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검정에 새 집을 짓고 이사를 했고 ㅇ과장의 아들과 딸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연년생인 유이와 인이는 같은 중학교를 거쳐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연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용이와 필이도 초등학생이 되었다.
세검정 새 집에는 대문 옆에 셔터가 달린 차고가 있었다. 물론 이사할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지만 나중을 생각해서 차고를 만든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 현대에서 최초로 국산차 포니가 생산되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윤도 자동차를 하나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고, 그리고 포니를 샀다. 차가 나오는 날은 온 가족이 나가 차 구경을 했다. 희는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 시루떡을 만들었다. 떡시루에 쌀과 팥을 안쳐 아궁이에 불을 지펴 떡을 쪘다. 자동차 보닛에 떡을 올려놓고 절을 하며 무사고와 안전 운전을 기원했다.
마침내 차고에 주인이 생겼다. 아이들은 신기해서 차를 만져보고 또 만져보았다.
윤이 서울시 건설사업소의 관차로 출퇴근을 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종종 데려다주곤 했지만, 이건 마이카가 아니던가.
운전연수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아직 운전이 미숙했지만 윤은 여기저기 다녀보고 싶었다. 장거리를 한번 달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윤은 아이들을 태우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정상 김여사와 희, 아직 어린 필이를 제외하고 네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셋째 연이 안가겠다고 버틴다. 평상시에는 명랑하고 유순한 아이인데 뭔가 기분이 틀어지면 말도 안 하고 억지고집을 부린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하다. 희가 억지로 방에서 끌고 나와 차에 태우려 했으나 바닥에 뒹굴며 버티니 할 수 없다. 유와 인, 용이만을 데리고 떠났다. 무조건 바다를 향해 달렸다.
강원도로 가는 길은 아직 비포장도로도 있고 구불구불 산고개도 많이 넘어야 했다. 아직 초보운전인 윤은 속도를 많이 내지 못했다. 뒤에서 빵빵거리기 일쑤였지만 윤은 무리하지 않았다. 가끔 다른 운전자들이 욕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속초에 도착했다. 바다도 보고 맛난 것도 먹고. 마이카로 떠난 첫 가족여행이었다.
아버지와 아이들만의 여행. 그런데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집안일도 많았지만 시어머니 눈치보랴 희는 같이 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누군가는 집을 봐야하지 않는가)
윤은 홀아비처럼 혼자 아이들만 데리고 다니며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 그 당시 가장들이라면 카메라 하나씩은 장만을 해야 했다. 큰 기념일에 사진관에 가서 찍어야했던 사진을 직접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집집마다 귀중품으로 장롱속에 숨겨놓았다가 나들이나 기념일에 꺼내어 필름을 사서 넣고 아껴가며 찍던 카메라. 스물 몇 방 정도 들어있는 필름을 다 찍으면 사진관에 가서 현상을 맡긴다. 사진이 나오는 날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사진보는 재미도 얼마나 쏠쏠했던가.
아직도 윤과 희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여전했지만, 희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층집도 생겼고, 카메라도 샀고 자동차도 장만하지 않았는가.
가진것 하나없는 말단 공무원인데다가 홀어머니 집으로 시집간다고 고향 친구들과 친정 집안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희의 친정 집안은 고향에서 꽤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물론 희가 성장할 무렵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형편이 되긴 하였지만, 희는 결혼 후 김여사와 윤의 빈약한 집안 살림에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년에 한번 친정집이 있는 부여에 다니러 갈때면 희는 윤이 내심 자랑스러웠다. 비싼 옷을 입지도 않았고 돈도 없었지만 누구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윤이 왠지 멋있었다. 처남들과 함께 백마강 가에 가서 한잔 먹고 불콰해지면 함께 부르는 노래소리도 좋았다. 윤은 잘하는 노래는 아니었으나, 한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에 푹 빠져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유명가수 부럽지 않았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희는 친정에서 돌아올때면 어머니가 싸준 농산물과 음식물 외에도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오느라 바빴다.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큰 살림을 하던 집이었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어머니를 졸라 얻어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짐이 엄청 많아지곤 했는데 차가 없을땐 이고지고 들고 오느라 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동차가 있다! 마음놓고 이것저것 보따리를 싸는 희에게 이제 여유마저 느껴졌다.
희는 알뜰하기도 하였지만 욕심도 있었다.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잘 살고 싶었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에 하는 결혼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아니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윤이 왜 좋았을까? 그가 갖고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엿본 것일까. 윤에게는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빛이 더욱 더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