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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아이에미 Dec 02. 2024

그녀를 믿지 마세요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잠깐만요, 아직 못 끈 게 있다고요."


체급이 제법 나와 비슷해진 아이가 필사적으로 힘을 쓰며 온몸으로 태블릿을 끌어안는다. 너, 아직 모르나 본데 엄마는 화나면 헐크로 변해. 평소엔 연약한 거 같은데 열받으면 힘이 세져. 아이의 품 안에서 기어이 태블릿을 뺏어낸다. 태블릿에서 모기가 앵앵대는듯한 작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실 지난 일주일간 아이 컨디션이 안 좋았다. 고열과 미열을 오가며 옆구리가 아플 정도로 계속 기침을 해댔다. 독감검사도 코로나검사도 음성이었고, 편도만 살짝 부었다기에 처방받은 약을 먹으며 쉬면 낫겠지 했는데 지지부진 열은 떨어질 줄 모르고 컨디션이 점점 나빠져 다시 병원을 찾았다.

청진으로는 폐소리가 나쁘지 않다지만 엑스레이 촬영을 권하기에 찍고 보니, 기관지에 가래가 진득하게 끼어 폐가 약간 접혔단다. 늘 접히는 내 뱃살만 봐왔지, 폐가 접히는 건 또 무슨 인체의 신비란 말인가. 풍선 불듯 훅- 하고 불어 펴주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잠깐 하며 애써 심각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껏 컨디션이 안 좋은 아이에게 '아프지만 말아라'라는 심정으로 맘 편하게 쉴 수 있게 미디어를 허용해줘 왔다. 그 어떤 영양제와 명의가 처방해 준 약, 엄마손 보다 더 효험 있는 약이었다. 번아웃이 온 수험생도 아닌데 공부는 쳐다도 보지 말고 쉬라고 하면 하루 사이 아픈 게 싹 낫는 울버린만큼 뛰어난 회복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아이가 일주일이 다 되도록 학교도 못 가고 홀로 병마와 싸웠다. 텔레비전, 태블릿을 벗 삼아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 격리를 했다.(사춘기의 투병은 엄마가 애달프게 보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는구나.) 


기어이 어제는 너무 힘들다고 해 영양제와 항생제 수액을 맞히고 왔다. 일주일 만에 열이 내린 아침, 겉으로 보기엔 많이 좋아진 것 같았지만 당사자가 아프다는데 어쩌겠는가.(에미가 돼서 뻥치시네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여태 이렇게 오래 아파본 적도, 응급실에 가본 적도 없었기에 가래를 뱉어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내 비록 열받으면 헐크가 되긴 하지만, 컨디션 안 좋은 아이에게 문제집을 들이밀 만큼 냉혈한은 아니므로 공부얘기는 일절 꺼내지도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근데 본인도 일주일간 놀며 쉬며 문제집 한 장, 책 한쪽도 안 읽은 게 마음에 켕겼는지 주섬주섬 문제집을 챙겨 들어갔다. 한 문제라도 풀면 '장하다 내 새끼'할 상황이니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힘주어 끌어내리고 설레발치고 싶은 입을 앙 다문 채 모른 척했다. 까칠한 사춘기 소녀에게 괜히 "문제집 풀게?"하고 말 붙였다 "다 나았나 보네? 이제 공부 좀 하지?"라고 받아들일 것 같아서. 제 마음의 소리를 듣고 문제집을 펼쳤다는 건 컨디션이 나아지고 있다는 일종의 그린라이트이니 그저 감사할 일 아닌가.


수액발인지 약발인지 더는 열도 오르지 않았고, 여전히 가래를 뱉지 못해 기침을 해댔지만 등교하지 못할 정도로 보이진 않았다.(다 들었어, 콧노래 흥얼대는 거.) 의사 선생님께서도 '요즘 유행하는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에 걸렸다 해도 아이들 다 학교 가요.'라며 법정 전염병이 아니니 못 갈 이유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학기 말이 되어가니 하루가 멀다 하고 수행평가를 보는데, 벌써 몇 개를 못 봤기에 수업결손이 더 생기면 아이가 버거워할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었다.


일요일 밤, 아이를 불러다 일단 내일은 등교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지거든 조퇴하라고 이야기했다. 라떼는 아파도 학교에서 아팠어. 양호실은 진짜 많이 아플 때만 가고 보통은 책상에 엎드려 누워 쉬었다고. 개근이 학생의 본분이고, 공부는 좀 못해도 개근하면 성실하다 칭찬받았다고.라고 3절까지 기어이 읊어대며.




그리고 오늘 아침, 사달이 났다.

아침부터 기침을 해대길래 네블라이저를 챙겨주며 다 하고 나와서 아침밥 조금이라도 먹고 약 먹자고 할 아주 자애로운 에미의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방문 걸어 잠그는 게 습관이 된 사춘기 아이에게 '몸도 아픈데 그러다 혼자 죽어도 모르겠다'며 문을 잠그지 말라고 당부했던 터라 아이는 무방비 상태였다. 불량식품 몰래 먹다 걸린 아이처럼, 돼지저금통에서 몰래 동전 꺼내려다 걸린 아이처럼 흠칫 놀라며 푸다닥 댄다. 아이의 부자연스러운 푸다닥거림은 이처럼 뭔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결정적 증거다. 아휴. 아이 앞에 수학문제집과 까만 화면의 태블릿이 있는 범행현장을 보니 방구석 탐정 에미는 촉이 딱 왔다. 눈치를 주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행동을 머릿속이 궁금하구나.


"태블릿 내놔."
"잠깐만요, 아직 못 끈 게 있다고요."

모기 앵앵대듯 작게 틀어놓은 유튜브가 문제가 아니었다. 유튜브 보는 게 하루 이틀 일이어야지. 이제 그런 걸로는 화도 안 난다고. 그랬다. 이 아이는 1학년 때부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범행을 시도하고, 시도하는 족족 들키고 마는 답지 도둑이었다. 문제집을 사자마자 답지를 아이가 모르는 곳에 숨겨두면 스마트폰으로 답지를 찾아내는 지능범. 하지만 소싯적 답지 베끼다 디지게 혼나 본 경험의 소유자인 명탐정 에미 앞에서는 그저 허술하기 그지없는 도둑일 뿐.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믿어주세요."


지금 이 소리를 후하게 봐줘도 최소 5번은 들은 것 같은데. 공부를 못해도, 안 해도 상관없으니 밝고 건강하게 자라라고. 거짓말만은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곧 죽어도 공부는 하겠단다. 하- 내 자식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주나, 부모교육서나 강연에서도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아이들 설 곳을 잃는다고 하니 뒤통수 얼얼하게 맞고도 믿어보겠노라 한 건데. 근데 오늘은 뒤통수가 아니라 감전이라도 된 듯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참을 인 세 번 애저녁에 다 셌다고.)


공부할 때 태블릿, 스마트폰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고도 해보고 밖에 나와서 공부하라고도 해봤다. 그럼 한동안 또 제법 열심히 잘한다. 그러다 내 신뢰가 쌓였다 싶으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친다. 매일 날 선 눈으로 아이 공부를 감시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남편은 자기가 공부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어쩌겠냐고 포기하면 편하다는 소리를 한다. '애랑 씨름하지 말고 학원 보내버려'라고도 한다. 너님은 속 편해서 좋겠수. 이보쇼, 난 이런 상태로는 학원에 기부하는 꼴이 될게 뻔하니 애도 포기하고 돈도 포기하는 바보짓 하기 싫다고요. 둘 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 놓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사실 사춘기 아이를 끌어안고 공부 가르치다 관계 틀어지느니 돈 버리는 셈 치고 학원 보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게 주변 엄마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눈앞에서 치워버린다고 속 편해질 성정도 아닌걸. 공부 주도권을 최대한 아이에게 넘기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문제집도 아이의 선택에 맡기고, 공부분량도 스스로 계획하게끔 했다. 매일 성실히 해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하루 건너뛰고 다음 날 이틀 치 몰아서 해도 잔소리하지 않으려고 참는다.(그러다 일주일치 밀리면 속된 말로 킹 받아 한소리 하고야 마는 내공 부족한 에미이지만.) 의심의 싹을 쳐내며 믿어보려 애쓰는 내게 한 번씩 거짓을 고하는 아이를 보자니 명치가 아파 눈물이 찔끔 난다. 결국에는 너를 포기할 까봐. '무식하게 오래도 참았네요. 결국은 사교육이 답이에요.'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시험도 없는 초등학생에게 공부 잘하는 걸 요구하는 게 아닌데. 모르는 걸 알게 되는 재미를 조금은 맛봤으면,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 조금이라도 생겼으면. 그리고 제발 정직하기라도 했으면. 백 점짜리 시험지보다 몸 튼튼 마음 튼튼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에미의 마음을 언제쯤 알아줄까.


사랑하는 내 새끼야. 네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누누이 말했잖아.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이 에미는 네가 꼭두각시 피노키오라 해도 네가 좋다고 노래하고 싶어. 평생 믿고 싶어.

공부 싫어해도, 못해도 괜찮아. 그저 너 좋아하는 거 찾아서 밝고 행복하게 살아. 제발.


Image by Jess Bailey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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