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아이에미 Nov 07. 2024

헤어질 결심(feat. 유튜브)

짙어지는 잔소리, 깊어지는 잔머리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영화 '헤어질 결심' 중에서)



그랬어야 했다. 스마트폰 이전에 텔레비전부터 플러그째 뽑아냈어야 했을까. 아니면 애초에 이런 환경을 만든 남편을 어머님께 반품이라도 했어야 했을까. 뭐라도 헤어질 결심을 했다면 지금 좀 달라졌으려나.

딸아, 너는 시나브로 유튜브와 찐친이 되었구나. 마침내.


유튜브와의 헤어질 결심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솔직히 고백건대 우리 집엔 각자의 스마트폰 외에도 3대의 스마트티브이와 노트북 2대 그리고 태블릿 PC까지 있다. 거실 한 면 가득 책장으로 꾸미고 싶은 바람은 포기한 지 오래. 거실에서 쫓겨나면 안방, 안방에서 쫓겨나면 작은 방으로 가을들판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세팅한 분은 역시 내 편인 듯 내 편 아닌 남편 되시겠다.


남편을 반품할 수도, 비 돈 주고 산 텔레비전을 버릴 수도 없으니 내 마음속 제거대상 1순위는 단연 유튜브였다. 하교 후 간식을 입에 물고 자연스레 리모컨을  쥐는 아이. 보고 배운 게 리모컨질이라 조작하는데 거침이 없다. 키보드 타자 치보다 리모컨 조작버튼으로 글자 입력하는 게 더 빠른 것 같다. 화면에 선명한 이미지가 채 뜨기도 전 후루룩 넘어가는 콘텐츠들 중에 원하는 걸 콕 집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은 눈보다 빠른 게 확실하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엄마 있지, 오늘 체육시간에 리듬체조를 했는데 우리 조 수행평가 노래 뭔지 알아?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주제곡이야. 이게 리듬체조에 맞다고 봐?"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방문하는 사춘기 이전의 말랑콩떡 같은 아이가 하교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나한테 말 걸어오는 순한 맛의 아이와 목이 칼칼해질 때까지 수다 떨어본다. 간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는 건 은 아이 유치원 하원 알람소리다.

 

"하~ 오랜만에 재밌었는데.

이제 다 쉬었으니 할 일 하고 있어. 동생 데리고 올게-"

"응, 엄마. 올 때 메로나~"


쿨하게 대답하는 아이를 뒤로 하고, 우사인볼트 뺨 칠 기세로 튀어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놀이터 지킴이 타임. 양지바른 곳에서 식빵 굽기 하는 고양이 마냥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을 기다려주는 게 일이다. 같이 뛰어놀자고 안 해서 늙은 에미만족도 최상. 성별나이 상관없이 함께 놀고 쿨하게 간식도 얻어먹는 작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엄지 척.


놀이터 벤치 신세를 벗어나고자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고 꼬셔본다. 작년만 해도 이 시간 동안 집에 혼자 있을 큰 아이가 걱정돼 좌불안석이었는데, 이젠 뻘짓거리하는 놈 덜미 잡아 책상에 앉혀야겠단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그럼에도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잊지 않는 것은 채찍질에 앞서 쥐어줄 당근이랄까.

I'm Ready.




푸드덕 쿠당탕

닭장에서 비상을 꿈꾸며 날갯짓하는 닭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필을 손에 쥔 채 해맑게 달려 나오는 아이. 미안한데 너무 티 나서 모른 척 하기도 미안해. 완벽범죄는 못할 성정이니 잔머리 쓰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출처: 네이버 [잡았다 요놈]


"문제집을 펼쳐 보긴 했어?"

"아이스크림 먹고 진짜 할 거야-!"

방문을 쾅 닫고 도망치듯 사라진다.

아, 딱콩 마려워. 순발력 부족으로 허공에 딱콩을 날린다.


유튜브를 잠깐만 본다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너무 친절하게 다음에 볼 콘텐츠를 추천해 주는데 어떻게 거부해. 아이도 처음엔 아무도 없는 집의 적막이 싫어 오디오 채워 넣는 느낌으로 틀어놨다고 한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볼매 유튜브, 네 죄가 크다.


방금 딱콩 맞을 상황을 모면했으면서, 어린 동생이 노는 소리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며 태블릿 PC를 빌려달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의대생이 공부할 때 듣는 ASMR을 찾았다나? MC²(엠씨스퀘어)같이 집중력에 도움이 되려나 싶어 허락해줘 본다. 나 역시 다른 멀티플레이는 안 되는 성능 떨어지는 인간이지만, 왕년에 공부할 때 음악 들으며 했었기에. '안 보고도 닮네' 날 닮은 널 발견하고 슬쩍 미소 지어 본다. 착각이었다.


아이는 그냥 남편이다. 생긴 것도 성격도 남편을 빼닮았기에  지분 없는 엄마로서 가끔 억울한데, 닮은 구석을 발견하고 소소하게 행복해 나란 여자. 참 불쌍한 여자네.

남편은 좋아하는 노래 한 곡만 파는 스타일인데, 아이 역시 수학 공부 대신 아이돌 최신곡을 파고 있었다.

"아니, 수학 문제집 푼다며." 나지막이 한 마디 한다.

"풀고 있었거든!" 앙칼지게 대꾸를 갈기는 아이의 문제집을 곁눈질해 보니, 고작 연산 3문제 풀어놓고 당당하기가 그지없다. 더 이상의 신경전은 거부한다. 잔소리도 물린다. 태블릿을 뺏어 들고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그날 저녁. 학습어플로 공부할 때, 모르는 정보 찾아볼 때 그리고 아이의 취미생활인 이비스페인트로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하는 등 생산적인 일을 할 때만 태블릿 PC 사용을 허노라 선언했다. 그리고 망할 놈의 유튜브 어플을 삭제하는 걸로 아이와의 신경전은 나의 승리로 마무리된 듯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 이후로도 아이 손에선  태블릿 PC가 떠날 줄 몰랐고, 공부는 끈질기게도 안 했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순식간에 아이 손에서 태블릿 PC를 뺏어냈다. 아이는 다급히 "잠깐만"을 외쳤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증거인멸을 못한 태블릿 PC 화면에선 눈치도 없는 유튜버가 비속어를 섞어 가며 깔깔대고 있었다.


호흡 한 번 하고 사용기록을 살펴봤다.

- 기가 차서 웃음 밖에 나오질 않는다. 유튜브 어플 지우면 끝일 줄 알았는데, 인터넷 검색창에서 유튜브를 검색해 즐겨찾기를 해뒀을 줄이야. 오, 천잰데?


품위를 잃기 싫었던 엄마는 가볍게 미쳐 웃어넘기는 걸 선택했다. '선택적 천재라는 단어는 이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 생긴 말일 거야'라며 친정식구들에게 너스레 떨본다.


Image by ecemwashere from unsplash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채플린


역시 제 자식 아니라고 제삼자인 친정엄마와 언니는 "너는 골치깨나 썩겠지만, 너무 똑똑한 거 아냐? 하하하- 귀엽다, 귀여워"라는 감상평을 내놓는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작전 변경이다. 태블릿 PC의 비밀번호 8자리로 다. 아이에게는 비밀번호 바꾼 사실도 일러주지 않았다. 몰래 사용하려다 바뀐 비밀번호에 당황하겠지? 당황할 딸아이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가 절로 씰룩거렸다. 아-꼬시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한동안 자중하던 이가 스리슬쩍 태블릿 PC에 손을 뻗더니 마치 투명망토를 뒤집어써서 아무도 본인을 보지 못한다는 듯 빠르게 들고 튄다.  - 뛰어 봤자 벼룩이지.




A few moments later...


이쯤 되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야 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이건 뭔가 잘못 됐다.

"똑똑- 문 열어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이의 방문을 노크해 본다.

"왜요! 잠깐만요!" 문이 빼꼼히 열린다.

"태블릿 PC 이리 줘봐." 아이 손에서 빼앗듯 낚아챈다. 순간 화면이 터치되며 일시정지된 유튜브가 다시 재생되기 시작한다. 벙-. 사고회로 일시정지.


"너 이거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어?"

동네 사람들, 저 천재를 낳았나 봐요. 우리 애가 8자리 비밀번호를 5분도 안 돼서 풀었어요. 던 찰나 아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답한다.


"나 이거 지문등록 해놨는데.
비밀번호 바꾼 거였어?
난 내가 오타 낸 줄 알았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나는 이렇게 붕괴되었다. 멘붕.


이렇게 아이 명의의 스마트폰이 없을 때부터 유튜브와 헤어질 결심을 했지만, 결국 헤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와의 지능 전에서 승리한 전리품인 유튜브 어플을 사수해 냈다.


학교에서 선생님도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신다 하고, 궁금한 것도 찾아보고, 노래도 들어야 하니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단다. 그래 너 잘났다. 디지털 유목민 나부랭이가 어떻게 디지털 원주민을 이기겠니.


'너를 닮았으면 언젠가 바른 길로 돌아올 거다'라며 사춘기에 들어선 딸로 골치 자근자근 썩는 나를 위로하는 친정엄마의 말씀이 틀림없으리라 믿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훗날 아이와 유튜브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중에서)


Image by Collabstr from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무쓸모 계약서, 결국 노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