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나의 아동기 시절 단짝 친구 지선이. (수년 후, 그녀에게 나는 단짝이 아니었다는 현실과 대면한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각설하고...) 90년대 대부분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있었지만, 그 시절 아동에게는 전화를 거는 것보다는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는 일이 쉬운 법이다.
나는 지선이네 집을 자주 두드리고, 놀러 갔다.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지선이 집에 없는데."라는 대답을 들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허탕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지만, 아쉬움은 어김없이 '내일은 같이 놀 수 있을 거야.'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희망으로 바뀌었다.
초등시절 나는 손편지를 참 좋아했다. 펜팔이 유행하기도 해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다른 지역, 해외로 떠나간 친구들과 편지로 자주 소식을 오갔다. 매번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며 드는 살짝의 불안감. '편지가 도착할까? 우체부 아저씨가 빠뜨리지는 않겠지?' 불안하면서도 설레었다.
편지의 도착 여부는 답장이 오면 밝혀진다. 편지가 누락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 나도 다시 답장을 썼다. 친구에게 있었던 일에 대답하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나에게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전했다.
휴대폰 없이 걷는 거리는 새로웠다. 인간으로서의 감각기능을 '재활성화'하는 경험이었다.
길찾기 기능 재활성화
: 길을 찾지 않고 걷는 길은 스스로 표지판을 관찰하고, 멀리 있는 지표 건물을 내다보며 길을 시뮬레이션하게 한다.
말걸기 기능 재활성화
: 방향이 애매하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
현실 소리 감각기능 재활성화
: 음악, 팟캐스트, 오디오북 대신 자동차 소리, 옆사람 소리, '도를 아시나요'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대기모드 재활성화
: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버스를 기다릴 때 그 사이에 왔을 메시지나 새로운 뉴스를 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정말 기다리는 것을 실제로 '기다린다' 틈을 틈으로 두고, 다른 것으로 메우려고 하지 않는다.
스마트 기기가 등장하기 전에 유년시절을 살아온 나는 아쉬운 것, 쉽게 안 되는 것이 많았던 기억... 한계가 일상인 기억이 있다.
학교 앞 문구점에도 팔지 않는 준비물은 미리 챙기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마저도 아침에 가면 이미 다 팔려서 얼굴이 하얘질 때가 있다)
친구의 행방을 찾아온 동네 놀이터, 옆 동네 놀이터, 친구가 다니는 학원 상가를 돌아다녀야 했던 시절이 있다.
집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저녁밥 때가 되면 엄마가 창문으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주던 기억이 있다.
먹고 싶은 것은 꾸욱 참았다가 엄마와 장을 보고,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며칠이고 기다리며 기대하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진보해야 하고, 편리와 효율을 쫓는 것이 진보라고 맹신했던 근대화를 살아온 관성 속에서 나는 성인으로 자라났다. 그 아쉬운 삶이 생태계로서의 지구가 온전한 균형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몰랐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오래된 것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인 줄 알았다.
이제는 많은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면서 갈수록 기다리는 능력을 잃는 듯하다. 기다리는 일이 줄어든 만큼 기대하는 일도 적어졌다. 그러고 보면, 소망도 실망감, 아쉬움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정보를 찾기가 쉬워지면서, 주변 사람에게 무언가를 묻는 일이 줄어들고, 굳이 말을 거는 일도 질문을 받는 일도 점점 줄어든다.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를 굳이 물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어쩌면 사소한 일상적인 정보가 오가던 때에는 그것을 계기로 서로 간의 여건이나 안부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금치 어디서 사요?" "ㅇㅇ상점에서 사는데 필요해요? 우리 집에 많은데 좀 가져갈래요?" 이를테면 이런 대화? ) 타자에게 말을 거는 일이 아주 큰 일처럼, 선을 넘는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아주 작은 말에도 상처를 주고받는 느낌이다.
노스탤지어에 잠기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는 정말 기성세대인가 보다. 갈수록 현재의 변화를 따라잡기가 버거워지는 불안감에 자연스러운 회귀 본능 같은 것인지? 생계나 앞날에 대한 걱정 없이 지내던 아무 생각 없던 어린 시절이 단순히 그리운 것인지.... 상대적으로 불편했지만 현재의 편익에 대한 욕구조차 없었던, 부족함 안에서 자족할 수 있었던 삶의 방식이 그리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