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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Bakha May 03. 2023

[전시] Whoseum of Who, 사이먼 후지와라

정체성 해방일지

삼청동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크고 작은 갤러리가 즐비해 있어 직업 예술가나 예술 애호가들에게는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되는 지역이다. 이웃에 거주하는 나에게는 산책로로 익숙하다. 요즘은 수련원 가는 길이기도 하다. 덕분에 길을 따라 늘어선 현수막의 전시 포스터라던가, 길 초입에 위치한 현대갤러리의 커다란 벽면에 정기적으로 바뀌는 전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그것은 마치 이따금 교보문고 매거진 섹션에서 표지의 칼럼 제목들을 확인하는 행위처럼, (그마저도 요즘은 안 하지만...) 현재의 쟁점을 따라는 가고 있다는 애처로운 안도감 비슷한 것일까. 연말연시가 되면 '트렌드 2023' 같은 실용서(한 달 뒤면 잊어버리고 말)를 읽었던 과거 직업병의 연장선 같기도 하다.


4월에 들어서면서 현대갤러리의 벽면은 굉장히 흥미롭고 귀여운 그래픽으로 바뀌었다. 사이먼 후지와라의 [Whoseum of Who]. 내용을 모를 때는 뭔 말인가... 요즘 인기 있는 젊은 스타 작가인가 정도로 지나쳤는데, 후니버스를 이해하고 나니 쏙쏙 들어오는 제목이다. 오전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렸던 전시였는데 작업방식이 무척 흥미롭고 예상외로(?) 심오해서 후니버스에 흠뻑 취해 한바탕 후와 함께 노래를 하고 시원하게 다이빙을 한 것처럼 시원했다.


Simon Fujiwara. [Once Upon a Who?], 2022. Animation / 출처: 현대갤러리


'후 who'는 "나 자신이 만화가 되지 않기 위해, 만화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사이먼 후지와라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허구의 캐릭터이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작가가 팬데믹을 거치며 부조리한 세계를 극단적으로 경험하며 작업하게 된 만화적 연작〈Who the Bær〉이다.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단절된 채 오로지 2D 이미지로만 인식되는 세상... 자신조차 2D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 흔들리는 인간성, 인간다운 것이 무엇일까, 정체성의 문제들... 수많은 의문 속에서 예술가로서 취할 수 있는 셀프 디펜스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작업으로 이해했다. 자신의 의문과 위기감을 굉장히 생산적인 방식으로 탐구했고, 심지어 공공적으로도 유익한 메시지로 소비되었으며, 그 결과로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았다는 모든 과정에 존경을 표한다.


'Who'라는 이름부터가 다층적 의도를 가진다. '누구'를 뜻하는 관계대명사면서 작가의 이름과 유사한 발음으로 읽히기도 하고 (Fu), 외관에서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곰돌이 '푸우 Winnie-the-Pooh'를 연상시키는 유희적이고 다중적 해석을 열어놓는 이름이다. 사이먼 후지와라는 후에게 곰돌이의 외모에 주체되지 않는 기다란 혀, 청바지, 황금 심장, 물음표 기호를 부여하여 친근하면서 낯선 캐릭터를 만들었다. 후니버스에 사는 '후'는 정체성이 없는 존재로, 다양한 정체성을 흡수하여 수집한다. W코리아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기성의 곰돌이 캐릭터에 부여된 재산권 보호차원의 법률적인 제약(상표권 소송)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설명한다. ^^

Simon Fujiwara. [Once Upon a Who?], 2022. Animation / 출처: 현대갤러리

후니버스의 '후'는 우리가 처한 정체성 투쟁의 시대를 반영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사피엔스가 믿는 '허구성', 그것을 후지와라 식으로 말하면 지금의 시대는 모든 것이 2D화, 상징화를 통해 이해되는 세상인 것이다. 매스컴을 통해 특정 인물에 대해 우리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파편화되고 선택적인 이미지의 반복, 그 과정에서 권력화된 2차원으로 이미지로 대상을 이해한다. 물음표를 달고 있는 '후'의 모습은 인종도 문화도 섞인 경계에 속한 자로서, 또 게이로서,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대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과 사이먼 후지와라 스스로에 대한 물음표를 반영한 것으로도 보인다.

Simon Fujiwara. [Once Upon a Who?], 2022. Animation

'개인'의 탄생 이후 우리는 점점 더 정체성에 집착하게 되었다. 국적, 세대, 성, 인종, 계층, 정치성향, 종교, 신체... 표준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찾고자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차이점과 공통점도 동시에 부각된다. 생존 경쟁과 권력 구조 안에서 특질들은 그룹화되고 배제되며, 불평등과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팬데믹 속에서 선명히 드러난 아시안 혐오와 의료 불평등, 전쟁은 생존 문제 앞에서 인간 사회의 민낯을 처절하게 보여줬다. 거대한 중국의 특정 지역이 바이러스의 원인이었다면, 그 지역의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시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아시아 인종 자체가 바이러스의 원인인가? 그렇다면 누군가를 아시아인으로 규정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외모인가?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은 백인과는 얼마나 먼 것인가? 사실상 논쟁이 무의미한 스펙트럼 사이를 끊임없이 배회하게 하는 것이 정체성 투쟁이 아닐까. 어떤 정체정을 규정하고 구분하려는 의도 자체가 때로는 정체성에 대한 논의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때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유대인으로 규정짓는 것이 학살을 위한 목적이었다면 그 정체성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싶으면서도 마구잡이로 어떤 집단성에 일방적으로 귀속되거나 한정되고 싶지는 않다. 드라마 <해방일지>의 주인공들처럼 유사한 것들 중 하나, 그래서 사라져도 괜찮은, 함부로 소비되는 존재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 '추앙'받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는 속하고 싶다. 소비당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를 인지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후지와라는 현재 우리의 인식 저변에 깔려있는 각종 아이콘을 차용한다. '후'는 유명 예술작품, 동화적 이미지, 정치, 제국적 이미지, 유명인 등 아이콘들이 가진 정체성을 흡수하며 후니버스를 자유롭게 떠다닌다. 콜라주와 패스티쉬 기법으로 기존의 '이미지'가 가진 힘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무너뜨린다. 그렇게 '후'가 개입된 이미지는 새로운 메시지로 재탄생한다.

어떤 정체성도 가지지 않은 '후'의 존재방식은 모든 정체성 안으로 녹아들어 그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서,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이먼 후지와라 / 사진출처: 현대갤러리

허구의 캐릭터 '후'는 정체성이라는 허구성에서 해방(Identity-free)을 외치는 이미지 놀이를 통해 '진정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에서 소비되는 나와 너의 모습, 누군가 간 것 같은 장소에서, 본듯한 패션과 비슷한 포즈로, 어디서 본듯한 그 음식...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의 패스티쉬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SNS의 집단적이고 이미지적인 권력 구조가 만들어지는 현상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진짜는 무엇일까.

작품 속에서 '후'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Who is she?

Who is he?

Who is 2d?

Who is pretty?

Who is fast?

...

사실상 의문문인지 평서문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은 이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나도록 이끈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중요한 이슈와 메시지를 이렇게 유쾌하게 표현하다니. 나는 그 부분이 가장 놀랍고 좋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표현했으며,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해내는 작업의 양적 규모 또한 그 자체로 예술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화시킨다.  

바스키아 작품의 패스티쉬 작업


정체성 없음을 표방하며 가장 진정성 있는 정체성을 드러낸 'Who the Baer', 사이먼 후지와라의 작업을 보며, 내가 이해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존재 방식, 즉 스스로에 대한 집착, 즉 자기 중심성(=죄)을 포기함(죽음)으로써 진정한 정체성으로 새롭게 거듭난다(=부활)고 믿는다. 특별히, 방법론적 측면에서 개인의 개별적 정체성을 연구하고 탐색하는 방향보다는 관계적 유기성 안에서 공동체적인 방식을 통해 가장 자기 다운 모습,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이해한다. (가정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내 인간성의 한계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에 가깝다는 나만의 가설을 조심스레 제시해 본다. ;b)

[Who's Identity Soup?], 2022 / 사진출처: 현대갤러리

후지와라가 언급하는 여러 가지 정체성 이슈들 - 계층, 성적 지향, 인종, 성별 - 등도 근본적으로 집단성에 근거하기도 한다. 혼자인 세계, 존재가 유일한 세계에서는 정체성의 논의가 무의미하다. 신인 하나님의 정체성도 세 가지 신격, 3위 일체 안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나'라는 분리된 개체만을 파고들어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려는 시도는 늘 막다른 벽, 허무에 도달하게 만든다. 후지와라 자신도 이 연작 이후 상당 기간 허무감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에 가까워져서도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함께 일 때 긴장되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바라보는 애정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의 경계를 건강하게 설정하는 것에 어설프고 미숙한 내가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도전이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의 '어떠함' 또한 관계성 안에서 끊임없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마치 '후'가 이미지가 상징하는 의미의 관계망을 횡단하며 또 다른 메시지를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듯이! 그렇게 나도 '나'라는 좁은 세계에서 탈출했다.

'Who'는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욕망 가득한 존재라는 것(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금단지가 보이면 그 기다란 혀로 꿀을 탐욕스럽게 먹게 된다. 통제 불가능한 혀 때문에 괴롭지만, 동시에 그런 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게 나인걸... 이라며 자기 수용적인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아 참 인간미가 넘친다.(아무래도 반한 듯) 나 자신만을 보면 보이지 않는 나의 어떠함에 집착하기보다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스스로 잘 받아주는 것. 그것은 요즘 나의 가장 큰 숙제이기도 해서 솔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나는 'Who'를 입체적 관점을 너머 판타지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듯하다.)


여하튼, 나의 약한 부분을 타자와의 관계 안에 씨앗으로 심어 호혜적인 상호작용으로 발현될 수 있는지 관찰해 보는 것... 이것이 아직까지 내가 아는 바 유일한 정체성 발견, 또는 해방 방법이다. (정립되는 것은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Once Upon a Who?]의 말미에서 호크니의 다이빙 풀 위에 올라선 'Who'처럼 나 자신을 관계의 풀 속으로 던져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3D가 되지 못해도 괜찮아~"라고 노래하며 몸을 던지는 2차원의 존재 'Who the Baer. 강력한 메시지와 정체성의 아이콘을 통해 자기 복제를 거쳐온 정체성 히어로 'Who'의 마지막 노래는 그의 존재 방식처럼 단순 경쾌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Hello, Who]라는 제목의 스토리텔링 북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는 "Who is Every Body."라는 유쾌 명쾌하고 어쩐지 따뜻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개개인 모두가 'Who'로서 존재성을 가지며, 그 존재성, 현존 위에서 모두가 동일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Hello, Who]


마지막으로, 정체성에 대한 집착으로 똘똘 뭉친 또 다른 'Who'로서 나는 'Whoseum'의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Whonivers'에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Who the baer'에게 던져보고 싶다. 법률적 제제를 가하지 않길 바랄 뿐. :)

콜라주의 패스티쉬, [Big Identity Deep Dive following Who], 2023.



후 더 베어 인스타그램

사이먼 후지와라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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